안녕하세요, 멘토 김동은입니다. 며칠 전, 저는 수험생 시절을 보냈던 피아노 연습실을 방문했습니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 처음 가본 건데 감회가 새롭더군요. 그곳에서 알고 지낸 학생들이 여럿 있는데, 이번 칼럼은 그 친구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쓰게 되었습니다.
1. 재능충 이야기
저는 막대한 레슨비를 제외하고 들어간 비용을 입시와 병행했던 아르바이트를 통해 스스로 해결했기 때문에, 쾌적한 개인 연습실 대신 조그만 음악학원에 딸린 연습실을 하나 빌렸었습니다. 그 학원의 원장님께서는 딸 두 명을 두고 계셨는데, 그중 한 명은 예술중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지금은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한 1학년이겠네요. 그 친구는 학교에서 3년 내내 실기 1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실력 있는 전공자라면 누구나 꿈꿔볼 법한 메이저 콩쿠르에 나가서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1등은 항상 그 친구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친구는 연습을 남들만큼 치열하게 하는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인 원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루에 많게는 두 시간, 보통은 한 시간 연습하고 마는 게 다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재능충‘이었던 것이죠. 아버지도 피아노 전공자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사실이 더욱 설득력 있게 와닿았는데, 여기서 재능의 힘에 무서움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반면, 그 학원에는 예술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입시생 2명도 있었습니다. 두 친구는 아직 고2인데도 마치 내일이 당장 대입 실기 시험인 것마냥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치열하게 연습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저도 ’저 친구들은 진짜 열심히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말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학생들이 제아무리 노력해봤자, 놀면서 쉬엄쉬엄 연습하는 원장님의 딸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지금까지 재능의 힘으로 모든 일을 수월하게 이뤄내다 보니, 힘든 일을 참고 견딜 줄을 모르는 딸을 염려하시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원장님의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문득, ’공부의 길을 택한 이들이 모두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듯 예체능의 길을 택한 이들 역시 실기에 모두 뛰어난 것이 아닌데, 이런 천재는 차라리 남들보다 복 받은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체능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아니 꼭 그렇지 않더라도 ’애매한 재능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말에 공감하시는 분들이 여럿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주변으로부터 ’~을 잘한다‘는 식의 칭찬을 자주 듣고 대회에서 상도 몇 번 받다 보면 자신이 그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그 일을 놓아주지 못한 채 막상 전공의 길에 뛰어들었을 땐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 데이고 말죠.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살리에르‘처럼 말입니다. (살리에르는 죽도록 성실하게 노력하지만 끝내 영혼을 울리는 음악을 작곡하지 못하는 반면, 모차르트는 망나니처럼 생활하면서도 타고난 재능으로 감동적인 음악을 손쉽게 만들어 냅니다. 그런 천재 모차르트 앞에서 살리에르는 극도의 열등감과 시기심을 느낍니다.)
2. 공부도 재능이라네요
예체능 분야에선 천재와 둔재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공부는 어떨까요?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님께서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유전자야. 노력만 하면 잘할 수 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서구의 발전한 나라들은 이 부분에 대해 객관적이라서, 유전자가 공부 쪽으로 아닌 학생들은 다른 쪽으로 갈 수 있도록 유도해준다. 따라서 자기 유전자에 맞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안되는 유전자들로도 다들 공부하려고 하니까 이런 비극이 일어난다.''
제대로 된 노력을 한다면 그렇게 천재 비슷하게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당신들도 노력하면 우리들처럼 될 수 있다“는 식의 말들은 그저 노파심에 천재가 둔재들에게 보내는 격려가 아닌가 싶습니다.
3. 근데요?
하지만 그런 천재들 앞에서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이 칼럼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3-1) 입시는 둔재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되는 게임이다.
어차피 천재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노력하는 천재를 이길 순 없겠지만, 보통의 입시에선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기기만 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는 데에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크게 잘난 사람들과의 게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3-2) 무엇보다, 환경 탓하지 말자.
제가 가장 강조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나보다 더 나은 환경 속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은 없습니다.
'저 친구는 저렇게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니 '
'저 친구는 저렇게 좋은 학원에서 재수를 하니'
'저 친구는 부모로부터 훌륭한 머리를 물려받았으니'
'저 친구는 힘들 때마다 의지할 수 있는 화목한 가정이 있으니' ···
이런 종류의 비교는 한도 끝도 없고, 하나같이 모두 비생산적입니다. 나를 피폐하게만 만들죠. 어차피 달라지는 것은 없는걸요. 좋은 환경 속에서도 불평만 늘어놓는 이들이 있는 반면,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이를 갈며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맨날 비교만 하고 살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그만큼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노력하는 인간이 될 것인지입니다. 이건 여러분의 선택이니까요. 스스로 바꿀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합시다. (또 혹시 몰라요. 각자가 지닌 핸디캡 그 자체가 뜻밖에 도움이 될지도.)
4. 맺으며
여러분들의 수험생활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지금까지 충분히 잘 해오셨고, 앞으로도 잘해나갈 겁니다. 스스로에게 좋은 것을 선물해주기 위해 시작한 수능 공부 때문에 자신을 너무 미워하고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비스킷 통에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고,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자꾸 먹어 버리면 그다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이걸 겪어 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다, 라고.''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중에서
PS)
메가스터디에서 저를 멘토로 뽑아주신 이유 중 하나는 ’실기와 공부 병행법‘ 내지 ’실기 준비 방법‘ 등에 대한 조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에 부응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에 대한 칼럼을 독자적으로 다루기엔 제가 적합하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한때는 서울대 음미체생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해서 칼럼에 녹여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저의 인맥이 아직 미대와 체육교육과까지 뻗어나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체능 계열 학생들의 칼럼 수요가 그리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래도 저의 본분은 다해야 하기에, 예체능 계열의 학생분들을 위한 약간의 첨언을 해보겠습니다.
예전에 예체능 수능 전문학원에서 학습 조교로 잠깐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보며 깨달은 점은, '공부를 금방 포기해버리는 학생들은 실기에서도 금방 무너져버린다'였습니다. 반면, 공부와 실기를 병행하는 와중에도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현명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얼마 남지 않은 수능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체능 여러분들의 입시는 수능이 끝나고도 쉬지 못하는 길고 긴 레이스가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연말, 새해는 모두 사치가 되어버리죠. 마음 단단히 먹읍시다. 그 과정에서 앞문이 잠겨있다면 뒷문을 열어보고, 뒷문도 잠겨있다면 아예 창문을 깨뜨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모든 실기고사가 끝이 나는 내년 1월 말까지, 곁에서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정말로요.
서울대
김동은 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