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목표달성장학생 20기 경찰대학 1학년 임정언 학생입니다.

오늘은 예고했던 대로, 수능 직전 특강으로 수능을 3번 치는 동안 제가 느꼈던 것들 중 한 번, 두 번 치신 분들이 배워갈 만한 부분들을 담은 3부작의 칼럼을 준비해보았습니다. 1편은 가볍게 수능 썰, 2편은 다소 무겁지만 3년 동안 쌓인 행동강령 공유, 3편은 Farewell 칼럼이 될 듯합니다. 이 3부작이 남은 10일 동안 제가 여러분과 함께할 마지막 칼럼일 것 같습니다. 저도 3년 동안 메가스터디 사이트 들락날락 하면서 깨달았거든요. 수능 끝나고는 각종 인강 사이트나 멘토 게시판 등등 얼씬도 안하고 신나게 논다는 걸요.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댓글 달아주셨던 분들만큼은 수능 끝나고 좋은 결과 들고 댓글 한 번만 달아주시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그동안 정말 수많은 고민과 응원 댓글들을 받았었고, 그 하나하나가 정말 큰 기쁨이고 보람이었기 때문이에요 :)

그동안은 모든 댓글 하나하나 전부 댓글을 달아드렸었는데, 지난 수학 공부법 칼럼 때 비슷한 내용의 수백 개의 질문들이 정말 물 밀 듯이 들어와서 끝까지 댓글을 달아드리지 못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번 칼럼만큼은 빠르게 댓글 확인해서 제대로 전부 댓글 달아드릴테니, 궁금한 점 있으면 많이 물어봐주세요!

1편은 제가 3년 동안 수능을 치면서 느꼈던 교훈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지난 번 칼럼과 마찬가지로, 일기 형식으로 ~다 체를 쓸테니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중간 중간 수능을 망할 수 있는 요소들에는 교훈으로 코멘트를 달아두었으니, 이걸 중심으로 확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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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수능, 21년 가을

나의 첫 번째 수능은 고려대 문과 최저를 맞추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전업 수시러로서의 수능이었다. 수능보다 내신에 투자한 시간이 많은 수시 고3의 첫 수능이었기 때문에, 입시 커뮤니티 등 어디선가 귓동냥으로 들은 각종 ‘허수 행동’들의 총 집합소였으며, 망한 수능의 본보기였다. 재수 학원 시절 룸메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만약 목표달성장학생이 되면 현역 수능썰로 ‘수능을 망하는 100가지 방법’ 칼럼을 개재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는데, 그것이 지금 현실이 된 걸 보면 정말 사람 일은 모르나보다.

이야기는 수능 전날, 수험표를 통해 배정된 시험장을 확인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조치원여고, 홀수형’

시험장을 확인한 순간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시험장은 거리, 위치 등의 이유로 선생님들조차 감독관으로 가기 싫어하는 기피 1순위 학교였으며, 이 학교가 시험장으로 걸렸다는 것은 시험 치러 가는 데에만 차로 40~50분 정도를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숙사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다른 시험장은 다 버스 대절이 가능했지만, 이 학교만 유일하게 각자 힘으로 시험장에 가야했다. 학교에서 1시간 반이 떨어진 곳에 사는 부모님께 셔틀을 부탁하기는 힘들었다. 결정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수능인데, 한 달 넘게 집도 안 가면서 힘들게 공부했기 때문에 엄마 얼굴을 보는 순간 펑펑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그렇게 나와 같은 시험장에 걸린 친구들이 분주하게 부모님께 전화를 거는 사이, 나는 친구 어머니의 차를 동냥해 함께 탑승하기로 했다. 전교생 중 내가 유일했다.

<교훈1>

자신이 어떤 시험장에 걸릴 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제2외국어를 선택할 경우, 제2외국어를 치는 시험장은 얼마 없기 때문에 집과 먼 거리의 학교로 갈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자신이 어디에 걸리느냐에 따라 기상시간 등 행동강령을 무조건 수정해야 한다.

한참을 뒤척이다 깨어난 수능 날 아침, 문제가 발생했다. 아침에 화장실을 갔는데, 정확히 그 날 아침, 모든 여학생의 고충인 생리가 터졌다. 1년 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이 날만을 준비했는데, 그것도 모르는 내 배는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들어보니 나 말고도 3~5명 정도가 그 날 생리가 터졌고, 그것 때문에 이미 수능이 망했다며 우는 친구들도 있었다. 급하게 뒤처리를 하느라 예상했던 시간을 훨씬 넘겼고, 배를 따뜻하게 해줄만한 것도 없어서 급한 대로 룸메가 준 핫팩을 테이프로 배에 칭칭 감아 방을 나섰다.

<교훈2>

수능날엔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니, 평상시 모의고사를 치면서 미리 돌발상황(급화장실, 급체, 배고픔 등)을 다 연습해놓아야 한다. 이 이후 재수, 삼수 수능 직전엔 일부러 화장실이 급할 때를 기다렸다가(...) 극한 상황에서 실모를 풀어서 미리 실전에서 당황할 만한 상황들을 대비할 수 있었다. 아마 수능 직전이라 쌓인 모의고사들이 많을 텐데, ‘20문제 남았는데 10분 남음’, ‘중간에 지진이 일어나서 시험 시간이 40분 단축됨’처럼 온갖 별난 상황들을 다 생각한 테마형 실모들을 한 번씩 쳐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이때 극한 상황에서 친 시험이기 때문에 점수에 크게 흔들리거나 개의치 않아도 된다.

<교훈3>

사실상 이게 현역 수능을 망친 가장 큰 요인이었다. 시험 내내 복통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재수, 삼수 때는 생리 주기를 미리 계산해서 만약 겹칠 경우 경구피임약으로 주기조절을 하고 갔다. 부작용을 걱정하는 학생들도 많지만, 어차피 본래 용도로 쓰는 것이 아니기에 약국에 가서 “제일 순한 걸로 달라”고 말씀드리면 웬만하면 부작용을 겪을 일이 없다. 혹시 모르면 미리 먹어서 대비해보는 것도 괜찮다. 수능은 일생일대의 날이니, 겪을 수 있는 모든 리스크는 다 대비해둬서 평상시 모의고사와 똑같은 컨디션을 만들어야 한다.

방 밖을 나왔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내 도시락이 사라진 것이다. 학교에서 도시락 단체주문을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임정언’이 박힌 도시락은 없었다. 정독실, 방, 로비, 담임선생님 전화까지 한참을 찾다가 포기하고 차로 갔는데, 알고 보니 나를 데려다주기로 했던 친구 어머니가 내 것을 미리 챙기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한참 시간을 허비했을 뿐더러, 행동강령에서 예상했던 시간보다도 늦게 시험장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교훈4>

6, 9평 때 수능 연습을 한다고는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6, 9평은 본인 학교에서 보고, 수능은 대부분 ‘처음 보는 학교’에서 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은 시험 전 날 예비소집일에 학교를 찾아가서 시험장에 찾아가는 과정까지 연습해보는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시험 당일 아침에 어떤 행동을 어떤 순서로 할 것까지도 행동강령에서 미리 다 대비해두어야 한다. 나처럼 ‘도시락 받아가기’ 등 평상시 모의고사에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수능날도 똑같이 대비하지 않으면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

긴 거리를 달려 외곽의 시험장에 도착하니, 학생들이 잔뜩 웅성거리며 밖에 모여 있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짐 검사를 받고 시험장에 올라갔다. 여기서는 그래도 어디서 들은 대로 어설프지만 행동강령을 잘 마련해두어서, 그걸 따라 시험장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그대로 따라했다. 시험장 내의 자리는 다행히 창가 쪽 좋은 자리였다.

책상 흔들리는지 확인하기, 의자 흔들리는지 확인하기, 방석 올려두고 앉기, 시계 붙이기, 필통 꺼내기, 수험표와 신분증 꺼내기, 지퍼 열어서 샤프-샤프심-컴싸-지우개 순으로 책상 위에 필기구 올려두기...

순서대로 행동강령을 이행하고, 배가 아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그렇게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이미 시간은 시험 시작 전 20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내 행동강령은 시험장에 40~50분 전 도착해야 전부 이행이 가능한데, 뭐부터 봐야하지?’

<교훈5>

수능 당일의 행동강령은 무조건 ‘기상시간’이 아니라 시험장 ‘도착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미리 시험장에 가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전부 계산하고, 최대한 빨리 도착해 머리를 예열시켜 놓아야 한다. 그래서 재수, 삼수부터는 6평, 9평까지도 시험장 거리가 멀 것을 대비해 거의 새벽 4시, 5시에 기상하고 1시간 ~ 1시간 반 일찍 시험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출근도장을 찍었다. 시험 시작 시간에 맞추어 시험장에 도착하는 것은 큰 패배요인이다.

드디어 감독관이 입장하였다. 다행히 유튜브로 ‘수능 종소리’ 영상을 너무 많이 보아서, 수능장 안내 방송은 매우 익숙하게 들렸다.

<교훈6>

유튜브로 ‘수능 종소리’ 영상을 검색해 “감독관께서 입실하실 시간입니다~”라는 방송이 나오는, 시계가 그려진 영상을 찾아보고 자투리 시간에 계속 반복해 듣자. 해당 영상의 소리가 수능장 내 안내 음원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수능 전 공부할 때 계속 듣고 있으면 실제 수능장 내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마음이 편해진다. 또한 옆 친구들이 “시험 도중 지진 발생 시 행동요령” 같은 것들을 주의 기울여 듣고 있을 때 이미 수백 번 넘게 들어보았기 때문에 듣지 않고 예열 지문 공부에 열중할 수 있다.

감독관이 입실하고, 약 40분 동안 파본검사, 방석이나 귀마개 검사, 수능 샤프와 컴싸 배부, OMR 배부가 이어진다. (여담으로 이때 샤프 색이 똥색이었는데,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필기구 얘기가 나오면 삼수한 친구들이 이 샤프 색상 얘기를 현역, 재수 친구들에게 무용담처럼 풀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라떼는 말이야... 너네는 이런 거 없지?)

<교훈 7>

40분 동안 정말 할 일이 없다. 이것 역시 학생들에게 최대한 자료 볼 시간을 준 후, 시험 10분 정도 전부터 호다닥 짐정리하고 시험지를 나눠주는 학교나 학원 실모와 가장 큰 차이점이다. 나는 이때 기출 지문을 하나 외워가서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고, 키워드끼리 연결하면서 마치 새로운 지문을 읽듯이 머릿속으로 구조독해 하는 연습을 했다. 잘 쓴 기출 지문을 독해하는 생각만이라도 계속해서 반복하면 머리가 식지 않고 각성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다. 현역 때는 22 6평의 바나나 지문을 외워갔다. 사람마다 좋은 기출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를 수 있으니,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구조가 명확한 글을 외워 가면 도움이 된다. 또, 학원이나 학교 실모에서 감독관이 말하지 않더라도 미리 40분 전부터 책을 다 집어넣고 멍 때리고 있는 연습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현역 국어는 정말 충격적으로 어려웠다. 9평이 쉬웠기 때문에 다들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나, 정말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브레턴우즈는 고등학교 때 전부 내신으로 꽤나 세세하게 배운 내용이라 쉽고 빠르게 넘어갔으나(금본위제를 비롯해 배경지식이 꽤나 중요한 지문이었어서, 이 이유로 고등학교 친구들 중 국어를 잘 본 학생들이 상당히 많았었다), 오히려 원래 약점이었던 철학이 발목을 잡아 헤겔 지문에서 크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맨 마지막 과학기술 지문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다음해 3월 재수학원에서 처음 목도하였다. 읽을 시간조차 없이 한 지문을 전부 찍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험이 끝나고, 홍삼과 청심환을 마시면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 화장실을 갔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화장실 줄이 복도 끝까지 늘어서 있었다.

돌이켜보면, 학교에서 친 6, 9평은 화장실을 바로 안 가고 떠들다 가는 친구, 답 맞춰보고 가는 친구들이 많아서 밀릴 일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는 시험 하나가 끝나면 모두가 동시에 화장실을 간다. 화장실 칸은 한 층에 10개 정도인 주제에 100명 넘는 인원이 한 층에 있으니, 순식간에 줄이 복도 끝까지 늘어선다. 이렇게 서 있으면 다음 시험을 준비할 수도 없고, 그냥 서 있는 채로 쉬는 시간이 모두 끝나버린다.

거의 15분 동안 화장실을 기다렸다.

“이제 시험 시작합니다, 빨리 들어오세요!”

감독관님이 어느새 교실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소리 쳤다. 나는 아직 수학 행동강령 노트도, 예열 문제도 풀어보지 못했는데 화장실도 갔다 오지 못한 상황이었다. 급하게 화장실을 갔다오고 나니 어느새 같은 반 사람들은 책을 치우고 있었다. 사실상 여기서 내 수능 수학 점수는 결정되었을 것이다.

<교훈 8>

사실상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사관경찰 시험을 쳐보지 않고 수능을 처음 치는 고3 여학생들이 화장실에서 여유를 부리다가 가장 크게 당한다. 전국 모든 시험장에 예외는 없으며, 재수, 삼수 때도 가장 먼저 화장실로 뛰어가서 볼일을 보고 나온 후 화장실 밖에 줄을 서서 당혹스러워 하는 고3 학생들의 표정을 너무 많이 보았다.

“여학생이라면 제발 시험 끝나자마자 바로 화장실로 뛰어가자!”

수학 시험이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옆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들렸다.

“쿵!”

“쿵!”

“철푸덕!”

학생들이 문제도 보지 않고 책상 위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특목고 출신으로서, 그동안 모의고사를 빨리 풀어서 자는 학생은 봤어도 아예 풀지도 않고 자는 학생들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5분도 안되서 한 반의 3분의 2가 책상에 엎드렸다.

‘말도 안돼, 제2외국어 시험장인데?’

제2외국어 시험장이면 시험장 분위기도 좋고 다들 열심히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시간이 부족해서 안달인 시험을 한 줄로 밀어버리고 눕는 것을 처음 목격하니 엄청난 현타가 몰아쳤다. 시험에 집중해야하는 와중에 ‘나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왜 이러고 있지?’라는 존재론적 고찰까지 이어지니 문제가 읽히지를 않았다. 점심시간에 서로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거의 다 일반고에서 수시 최저를 맞춰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이라 국어, 영어, 탐구만 열심히 보고 수학은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담요를 덮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옆에서 자는 친구들을 보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교훈9>

수능 시험장은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공간이다. 같은 시험장에 어떤 사람이 모이는지는 보통 시험장이 위치한 지역에 따라 달라진다. 개인적으로 분위기를 많이 타기 때문에, 열심히 푸는 학생과 풀지 않는 학생이 명확히 갈리는 수학의 경우 그동안 시험장 분위기에 따라 점수 차이가 많이 났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주변에서 같이 시험을 치던 학교 친구들, 학원 친구들이 시험장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변이 이상하더라도 제 갈 길을 가는 마인드셋이 필요하다.

시험 시작한지 20분이 지나서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또 오줌이 마려웠다.

“이상하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 다녀왔는데. 아까 너무 급하게 갔다 왔나?”

그냥 긴장 때문인가 보다 하고 무시하려 했는데, 나중엔 집중도 안 될 수준으로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안 돼, 한시가 급한 수학 시험인데, 일단 버텨.”

시험 1시간 정도가 지나자, 이젠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화장실을 다녀왔다. 금속탐지기로 검사하는데, 배에 붙인 핫팩이 괜히 탐지기에 걸릴까 벌벌 떤 것은 덤이었다. 이렇게 집중을 못한 40분, 화장실에 간 10분, 총 50분의 시간을 날렸다.

<교훈10>

시험 시작 20분만에 화장실에 가게 된 이유가 ‘홍삼’ 때문이라는 것은, 재수 5월 더프 때가 되어서야 안 사실이었다. 홍삼을 원래는 한 두 개씩만 먹다가 모의고사 때만 매 쉬는 시간마다 먹었는데, 홍삼 자체가 아깝다보니 수능 때에만 아끼지 않고 먹어서 홍삼을 적게 먹는 평상시에는 홍삼을 많이 먹을 경우 이뇨작용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은 한 마디로 “평상시에 안하던 짓을 수능 때 해서”였다. 실제 수능에서 ‘수능이라는 이유’ ‘모의고사보다 더 특별하다’는 이유로 아무리 그게 더 좋아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안 된다. 무조건 나의 각본대로만 모든 것을 이행해야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마주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이 되자, 다들 도시락을 꺼내 밥을 먹었다. 내 도시락도 보온 도시락이었지만, 이미 차가운 얼음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교훈11>

3년 동안 수능 도시락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수능날 밥은 아무리 보온에 신경 써도 차가워져 있다. 찬밥을 먹는 데 익숙해지고, 만약 나처럼 긴장한 상태에서 많이 먹으면 위경련이 오거나 배가 아픈 특이 체질들은 식사에 더 신경쓰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삼수 때는 모의고사 때마다 실제 수능 때 먹을 도시락을 싸서 다니면서 도시락을 먹었을 때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수능 시험장에서 먹을 도시락을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경험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복도에서 고등학교 친구들을 몇 명 마주쳤다. 수시 친구들은 이미 천장을 뚫어버린 수능 난이도에 그저 충격으로 멍만 때렸고, 정시 친구들은 마주칠 때마다 이미 망했다며, 재수가 확정되었다며 펑펑 울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직 수능이 끝나지 않았다며, 남은 영어와 탐구만이라도 제대로 치자며 꼭 안아주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수능 역시 이미 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화장실에 휴지가 다 떨어져서 화장실을 갈 수가 없었다.

<교훈12>

그동안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여학생 화장실에서 수능 도중 화장실 휴지가 다 떨어지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수능이나 사관·경찰을 한번만이라도 쳐봤다면 휴지를 챙기고 다니지만, 고3 학생들은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휴지가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으니, 여학생은 아침에 휴지가 있는 상황에서도 계속 휴지를 들고 다니면서 휴지가 없어 화장실을 못가는 상황에 대비하자. 화장실 줄을 기다리는 건 어떻게 할 수 있어도, 휴지가 없는 건 진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삼수 때는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서, 이미 휴지가 없을 걸 예상한 점심시간부터 화장실 문 앞에서 여학생들에게 휴지를 나눠주고, 행동강령 상으로 더 이상 화장실에 갈 일이 없었던 탐구 쉬는 시간에는 내 휴지를 화장실에 기부하고 오는 여유까지 생겼다.)

영어가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내 앞에서 시험을 치던 분이 감독관을 호출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감독관님은 곧바로 나에게 오셨다.

“샤프로 종이에 밑줄을 긋는 소리가 너무 커서, 조금만 작게 밑줄을 그어달라고 합니다.”

이런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기에 당황스러웠다. 애초에 샤프에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날 수 있을까? 어떻게 소리를 줄여야 하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다 들었다. 마침 영어 풀이가 순항 중이었는데, 펜 소리를 작게 내는 데 집중하니까 영어 지문을 읽던 집중력이 조금 흐트러졌다.

<교훈13>

사람들은 보통 “빌런과 같은 시험장이 되면 어쩌지?”를 고민하지만, “내가 빌런으로 지목 당하면 어쩌지?”도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수능 날은 모두가 예민하기 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한 사정으로도 컴플레인이 들어올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받을 것을 넘어 피해를 줄 것까지도 생각해보면서, 그런 지적을 들었을 때 당황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사 시간이 왔다. 한국사 시간에는 어디서 들은 대로 쉬는 시간에 온전히 탐구 공부에 집중하고자 화장실을 다녀왔다. 하지만 평상시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칠 때에는 다들 자는 와중에 손 들기가 눈치 보여서 한 번도 다녀온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화장실에 다녀와보니 오히려 루틴이 깨지고 시험지에 대한 집중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탐구는 아무래도 중간 쉬는시간과 답지 바꾸는 텀이 짧다보니, 그만큼 정신이 없고 집중력을 계속 유지가 쉽지 않다. 그 면에서 중간에 화장실에 다녀오고 세수하면서 집중이 풀린 것이 평상시보다 더 안 좋은 선택이었다.

<교훈14>

아까 교훈의 연장선이다. “좋아보인다고 수능에선 안하던 짓을 하지 말자.”

탐구가 끝났지만, 이미 박살 난 멘탈 상태를 보았을 때 제 2외국어까지 볼 수 없었다. 제2외국어를 포기해도 절차가 길어 일찍 나가기엔 쉽지 않으니, 그냥 끝까지 치는 것을 추천한다. 고등학교 때 수능을 망친 줄 알고 제2외국어를 안 쳤다가 수능을 잘 봤는데도 서울대를 쓰지 못한 친구가 실제로 있었다.

수능이 끝나고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데, 사람들 무리 사이로 가족들이 보였다. 이미 망한 수능을 생각하면, 멍청한 나를 교문에서 기다려준 가족들이 너무 고맙고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가족들과 저녁으로 시험장 근처 고깃집에 들어갔다. 고기가 나오는 사이, 내가 원서 쓴 대학들의 1차 결과를 확인했다.

“합격입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합격이라고 적힌 학교들은 내 지금 수능 점수로는 면접장에 갈 수 없다는 것을.

“합격자 명단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저를 맞췄거나, 최저가 없는 학교들은 전부 내 이름이 없다고 말하였다. 심지어 합격을 확신한 한 학교는 수험번호를 잘못 적은 줄 알았으나, 2번, 3번 적어도 똑같이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는 멘트가 뜨자 가슴이 내려앉았다.

‘안돼, 안돼!’

나 혼자 핸드폰으로 결과를 확인해, 영문도 모르는 가족들 사이로 고깃집을 그대로 뛰쳐나가 길거리를 달렸다. 그리고 그대로 도로변에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 이게 3년 동안 죽을 힘을 다해, 시험기간이 아닐 때도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미친 듯이 공부해 얻은 결과의 끝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또 웃으며 스쳐지나가는 사람을 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한 학교의 과잠을 입고 있었다. 내 수능 성적으론 갈 수 없었던 그 학교, 플래너에 매일 적혀 있던 그 학교의 과잠이었다.

대체 서울에 있는 그 학교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는거지?

마침내 고개를 들어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랬다. 여기는 조치원. 눈앞에 내가 꿈에 그리던 고려대학교의 정문이 있었다. 고려대 과잠을 입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물밀 듯이 나왔다. 운명의 장난처럼 내가 시험 친 학교는 그토록 간절했던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의 코앞이었던 것이다.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나를 비웃듯이 노려보던 그 정문과, 그 배신감을 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꼭 재수하고 고려대보다 더 나은 학교에서 성공해서, 고려대가 나를 안 뽑았다는 사실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단단해졌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일어나서 고깃집으로 걸어가는 일밖에 없었는데도, 절망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더 나은 미래만이 나를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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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실패한 수능의 교본 수준인 현역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본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 말하자면 고려대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고, 지금은 현역시절 저에게 불합격을 준 모든 대학을 다 좋아합니다. 다만, 당시 6광탈과 망한 수능의 충격적이었던 경험과, 그 과정에서 우러나온 해당 순간 생각의 일부였을 뿐이니 내용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보다 현역 때 이야기가 길어져서, 재수 삼수 이야기는 1편을 반으로 쪼개 내일 적을 다음 칼럼에 담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칼럼에선 굵직굵직한 사례형 패착 요인들만 담았고, 구체적인 세부 행동 요령들은 2번째 행동강령편에 담아오겠으니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 여러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