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목표달성장학생 20기 경찰대학 1학년 임정언 학생입니다.

지난 칼럼에 이어 오늘은 재수 이야기를 마저 풀어보겠습니다. 삼수 때는 교훈을 얻을 만한 행동이나 군더더기가 딱히 없었어서, 생략하거나 Farewell 편을 통해 썰로나마 잠깐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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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가을, 재수

기숙학원에서 재수를 했던 나는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40분 거리의 시험장으로 향했다. 분명 루틴에는 자는 게 포함되어 있지 않았는데, 버스 안의 무거운 공기를 느끼니 졸음이 쏟아졌다. 어느새 주변 사람들이 다 자고 있었다. 학원에서 일주일 전부터 매우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도록 생활패턴을 바꾼 여파였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원래 계획했던 김동욱 EBS 연계교재를 쳐다보았다.

<교훈1>

수능날 아침에 피곤한 건 정말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잠을 충분히 자두는 것도 좋고, 어쩔 수 없다면 이동 중간에라도 잠을 청하는 것이 좋다. 시험장에서 졸음이 쏟아지면 정말 큰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뇌는 기상 후 풀가동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여기에 예민하다면 나처럼 커피로 버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시험장에 가니 절반이 주변의 전국단위 자사고에서 온 고3, 절반이 우리 학원 학생들이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실모에 절여진 N수생 VS 공부는 잘하지만 수능은 처음인 고3’의 차이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행동강령을 적어 와서 정해진 예열지문을 보고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는 비슷했지만, 시험장에 대한 적응이나 경험에서 오는 세부적인 노하우들은 달랐다. 내가 관찰한 차이에 대한 내용은 뒤에서 더 자세히 다뤄질 예정이다.

마침내 시험장 의자에 앉았는데, 의자가 너무 딱딱하고 허리가 아팠다. 처음엔 괜찮았지만, 갈수록 엉덩이가 아팠다.

<교훈2>

고3은 괜찮지만, 기숙이나 재종에 있는 친구들이 유의할 점이 있다. 학원 의자는 보통 수강생들의 편의를 위해 푹신한 의자로 마련하기 때문에 여기에 적응되기 십상이다. 만약 고3 때를 생각해서 괜찮을 거란 생각에 오랜만에 시험장의 딱딱한 학교 의자에 앉으면 정말 불편하고 엉덩이가 오래 버티기 힘들다. 이때는 혹시 원래 학원에서 사용하던 방석이 있다면 깔아주는 것이 좋다. 내가 학원에서 쓰던 그 자리처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덤이다.

예열지문을 차분히 풀고 있는데, 내 앞 자리에 다른 기숙에서 온 학생이 앉았다. 그리고 책상을 몇 번 흔들어보더니, 바로 복도로 뛰쳐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학생은 선생님 한 분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거 보세요, 책상이 흔들리잖아요.”

“그런데 학생, 지금 남는 책상이 없어요.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은데.”

시험관리본부에서 날벼락을 맞은 감독관 선생님은 책상을 몇 번 흔들어보시고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저 이 책상으론 수능 못쳐요.”

“그럼 감독관 책상으로라도 바꿔줄까요?”

선생님은 뒤쪽에 있던 감독관 책상을 그 학생 자리로 가져오셨다. 그러나 이번엔 의자 높이와 책상 높이가 맞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그 학생은 약 20분 정도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원래 자리에 앉았다. 7시 20분부터 40분까지, 그 학생으로서는 예열지문을 볼 수 있는 소중한 20분을 날린 것이다.

내가 본 그 학생의 마지막 모습은, 제2외국어 포기할 사람을 묻는 질문에 손을 들고 다 싼 가방을 맨 채 시험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던 장면이었다.

<교훈3>

수능장 책상과 의자가 자신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오자마자 책상과 의자부터 체크하고, 만약 흔들린다면

- 의자: 다른 자리의 의자와 바꾸자. 해당 자리의 사람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 경우에만 할 수 있는 일로, 시험장에 일찍 도착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 책상: 종이를 끼워 넣어 수평을 맞추자. 책상은 위에 이름이 부착되어 있어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책상의 수평을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럴 일은 없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수능 일주일 전부터 수능 루틴에 맞추어 학원 책상에 앉기 전 책상을 흔들고 종이를 바닥에 끼워 넣는 작업까지 연습했다. 이 정도로 수능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계산된 행동’이어야 한다.

추가로, 책상 밑에 종이를 끼워 넣을 경우 감독관 분들이 혹시나 종이에 이상한 게 적혀있지는 않나 따로 확인하는 작업을 거치신다. 혹시 모르니 먼저 사정을 말씀 드리고 검사를 받도록 하자.

<교훈4>

상황이 본인이 예상치 못한 대로 흘러가면 당황하면서 수능 전체를 망칠 수도 있다. 혹시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도 여기에 대해 분노하거나 항의하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먹자. 앞선 상황에서 책상을 바꾸지 못했더라도, 종이를 끼워 넣는 형식으로 충분히 수습이 가능했다. 괜히 모든 것을 원래 하던 대로 하려고 고집하다 더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국어 시험이 끝났다. 학원 친구들이 누구와 레이스라도 하듯 미친 듯이 각자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화장실로 뛰어간다. 화장실을 갔다 나오니 고3 학생들이 이미 줄을 늘어서 있고, 경험이 있는 N수생들은 재빠르게 볼일을 다 보고 유유히 화장실을 나오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니 작년 고3 시절 국어시험이 끝난 후의 내가 떠올라 괜히 마음 한 편이 불편해졌다.

<교훈5>

이미 이전 칼럼에서 말했기에 빠르게 넘긴다.

화장실은 빨리 뛰어갔다오자!

수학시험이 시작되었는데, 이번엔 신기하게도 엎드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들 쥐 죽은 듯이 열심히 문제를 풀었고, 역시 자사고 + N수생이 모인 시험장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장 분위기도 좋으니 나도 신이 나서 문제를 풀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이를 닦는데 사람들이 벌써 세면대 앞에서 김칫국을 마신다.

“나 국어는 다 맞은 듯 ㅋㅋㅋ”

“오 문과 메디컬 가능?”

“야 15번에 답 몇 번이었음?”

나는 재수학원에서 이미 많이 겪어본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서 이 닦는 줄을 기다리던 고3 학생들의 동공에는 불같이 지진이 나고 있었다.

<교훈6>

운이 안 좋으면 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화장실에서 답을 맞춰보는 친구들을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신하는데, 이 친구들이 정말 실수더라도 수능 만점자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나의 고3 시절엔 이런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이 무서워서 귀마개를 끼고 화장실에 갔다. 본인의 멘탈이 약하다면 이 역시도 좋은 방법이다.

영어 시간, 슬슬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식곤증을 피하기 위해 얼음덩이가 되어버린 점심도 소식했지만, 식곤증이 문제가 아니라 체력이 문제였다. 피곤을 피하기 위해 행동강령에 적힌 대로 졸음껌 4개를 입에 털어 넣고 버텼다.

<교훈7>

영어, 혹은 탐구부터는 체력과 집중력 싸움이다. 나는 체력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이뇨 작용을 촉진하지 않는 선에서 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눈에 시원한 안약을 넣은 후, 졸음껌을 4개를 먹는 루틴을 가졌다. 이런 식으로 각자 집중력을 끝까지 잃지 않기 위한 최후의 보루들을 하나씩 마련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영어가 끝나고 탐구 시간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지난번을 교훈 삼아, 원래 하던 대로 한국사 중간에 화장실을 가지 않고 한국사 시험 전 화장실을 다녀왔다. 한국사 시간에도 자지 않고 계속 의미 없이 문제를 쳐다보고 읽으면서 시험지에 대한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교훈8>

한국사 시간을 보내는 노하우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은 체력 비축을 위해 취침을 선택하지만, 나는 누워서 자고 일어난 후에는 문제 읽는 리듬이 깨져서 100%의 집중력을 유지하고자 자지 않고 문제를 반복해서 검토하는 전략을 취했다.

<교훈9>

탐구 시간 쯤 되면 슬슬 배고파진다. 책상 위에 간식이나 초콜릿, 사탕을 놔두고 시험 치는 도중에 먹는 건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다. 휴지 위에 초콜릿 3개를 올려두고 한국사 전 하나, 끝나고 하나, 탐구 사이 하나를 먹는 사람도 보았다. 눈치 보지 말고 배고프면 먹자!

재수 때는 다행히 제2외국어까지 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열심히 공부를 하고 가긴 했지만, 몇몇 친구들은 답을 한 줄로 밀고 자거나 감독관과 눈싸움을 하는 등(...) 갖가지 방식으로 지루한 시간을 흘려보낸다.

<교훈10>

서울대를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2외국어를 홀대하지만, 막상 진학사에 넣어보니 제2외국어 성적으로 나를 추월하는 경우도, 제2외국어 성적 때문에 나한테 밀리는 경우도 생겨서 매우 놀랐다. 겨우 0.5점 정도씩이라도 쌓이면 정말 커진다. 정시는 정말 등수 하나, 한끗 차이의 경쟁이기 때문에 서울대를 노릴 경우 제2외국어를 경시하면 안 된다. 갈 사람은 5등급을 맞아도, 9등급을 맞아도 가지만 1등급을 맞은 경쟁자보다는 한 단계 낮은 과를 써야할 리스크가 생긴다. 사람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 개념 요약 강좌라도 메가패스를 통해 듣고 가자.

다시 학원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렇게 길었던 한 해가 끝났구나.’

정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모든 것이 연습한 수백 가지의 시나리오 중 하나에서 흘러갔기에 미련이나 후회가 전혀 남지 않았다. 드디어 모든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축제 분위기가 된 버스 밖 풍경을 살짝 흘겨보았다. 기숙학원에서 지내느라 몰랐던 세상 밖은 매우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미 어두워져 불빛 하나 없는 상가들 사이로 외롭게 불이 켜진 가게 하나가 보였다.

크기가 소형 커피숍과 비슷한, 아주 작은 약국이었다. 그 약국의 유리창은 온통 ‘서울대’를 상징하는 마크로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약사님이 서울대 약대 출신이신 모양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거리의, 아무도 없는 약국 안. 가운을 입은 사람 한 명이 혼자 우두커니 약국 안에 서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서울대 마크 뒤의 인간 형상이 정말 쓸쓸해 보였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학벌에 집착하고, 수능에 집착하는 걸까?

내가 지난 4년간 대학 입시를 위해 죽어라 달린 이유는 정녕, ‘나의 이력’이라 적힌 창문에 예쁜 대학 마크 딱지 하나 대문짝만하게 붙이기 위함이었을까? 서울대를 가보겠다고 제2외국어를 친 나였지만, 깜깜한 밤거리에 내 방 크기 만 한 가게 안에서 자기 자신만을 마주한 서울대 출신 약사를 수능이 끝난 버스에서 스쳐지나가니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동안 이렇게 열심히 달렸던 걸까?

1년간의 긴 여정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에서 든 오만가지 생각들은 곧 ‘수단을 위한 삶을 살지 않겠다.’는 나의 자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대학은 결국 내 인생에서 수단이고, 거쳐 가는 하나의 길목일 뿐이었다. 나에겐 대학 이름 하나하나에 목을 매달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저 내가 나의 능력과 꿈을 펼칠 수 있는 최선의 대학을 선택했다면, 그걸로 족할 일이란 사실을 재수가 끝나서야 깨닫고 말았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내가 삼수를 끝마치고, 미련 없이 다른 이름 높은 대학들의 등록을 포기한 채 경찰대로 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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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재수 수능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예상했던 방향대로 모든 것이 흘러갔다 보니 현역 수능보다는 풀 이야기보따리가 더 적었던 것 같네요.

이렇게 제 23 수능 썰을 마칩니다. 모처럼 여운이나 의미가 깊게 남는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수능 전 조만간 또 다른 칼럼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