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한고비 넘어가고, 진을 빼놓는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년에 독재학원에만 있느라 여름이 이렇게 더운지 잊고 있었습니다.
저는 학원가로 유명한 은행사거리에 종종 가는데요. 지나치는 수많은 학생의 모습을 보며 대견함과 측은함을 느낍니다. 동시에 '나도 수험생 시절, 저렇게 어두운 표정과 무거운 걸음으로 길을 걸었었지' 하고 제 지난날을 돌아보게 됩니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돼서 여름의 열기, 사계절의 변화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있다보니, 요즘 낮이 짧아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가 지나간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앞으로 하루가 갈수록 밤이 길어진다는 얘기죠.
작년 독재학원을 다닐 때, 시간표가 정해져 있어서 특정 시간대의 하늘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때처럼 같은 시간이지만, 어느새 해가 빨리 지는 것 같고, 하늘이 푸르게 물드는 것을 보고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지겨운 수험 생활을 당장 내일이라도 끝내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끝내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공부하고 싶다는 양가적 생각이 충돌하곤 했으니까요.
여름 방학이 1주일 정도 지났습니다. 방학 동안 세운 목표는 잘 지켜나가고 있나요?
목표는 세웠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막상 계획을 지키기가 매우 귀찮고 힘들 겁니다. 괜히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겠죠. 슬슬 D-100이라는 숫자가 눈앞에 아른거리며 목표했던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로 불안한 심정을 가질 학생이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학생이라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드는 생각, “오늘 공부 왜 하는가?”에 대해서 칼럼을 써보려고 합니다.
#시험을 잘 볼 가능세계
수험 생활은 매일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수능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험은 상대 평가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저는 시험이란 전체 응시생과 싸우는 게 아닌, 스스로와 싸우는 것이라고 비유하는 게 더 와닿는다고 생각합니다.
매순간 쉬운 선택과 동떨어진 것을 골라야 하며 설령 좋은 선택을 했더라도, 그게 정말 좋을지는 시험 날까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 또한 시험을 준비하며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불확신이었습니다. 내 선택에 대해 불안함이 들고, “과연 이게 맞나?”라는 의문이 수능의 그날까지 따라다녔습니다. 평가원 모의고사와 사설 모의고사를 보며 내 실력을 점검할 수 있지만, 언제까지나 모의고사일 뿐 수능의 결과와는 다를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시험을 잘봐도 현역 때 수능 생각에 기분이 마냥 좋지 않았습니다.
그 불확신은 공부하는 행위에 대한 의구심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오늘 공부한다고 성적이 오를까?, 이번주만 일찍 들어가고 다음주부터...”
여러분은 오늘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오늘 공부하는 이유는 한 문제 더 맞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공부 더 하고, 덜 한다고 해서 점수가 등락할 거였으면, 수능은 사고력 시험이라는 별칭을 얻을 수 없었겠죠. 오늘 하루, 또는 모종의 이유로 일주일을 공부 안 해도 점수에 영향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리프레시가 되어 성적이 오르는 경우도 있죠.
그렇다면 수능 결과에 당장은 아무런 티도 나지 않을 오늘을, 그토록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019학년도 수능 가능세계 지문
기출을 풀며 한번씩 보았을 법한 가능세계 지문입니다. 지문에서 가능세계는 명칭 그대로 ‘가능한 세계’라고 정의됩니다. 그 개념의 예시로, 기차를 놓쳐 지각을 한 상황에서 ‘만약 내가 8시 기차를 탔다면, 나는 지각을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어떤 세계에서는 내가 탄 그 기차가 고장으로 선로에 멈춰 여전히 지각을 합니다. 하지만 내가 기차를 탄 세계들 중에서, 내가 기차를 타고 별다른 이변 없이 제시간에 도착한 세계가 그렇지 않은 세계보다 우리의 현실세계와의 유사성이 더 높습니다. 따라서 나는 ‘만약 내가 8시 기차를 탔다면, 나는 지각을 했다.’라고 유사성이 낮은 일을 주장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개념을 우리의 수험 생활에 그대로 적용해 봅시다.
수능 결과에 당장은 큰 영향이 없어 보이는 오늘, 우리가 샤프를 놓지 않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능 때 원하는 점수를 받은 가능세계와 현실과의 유사성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몇 달 뒤 수능 날, 원하는 결과를 얻었더라면, 반드시 오늘도 공부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공부를 하는 거죠.
#막연한 불안감을 무너뜨리는 법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드는 불안감도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작년에 별의별 걱정과 불안을 다 했습니다. 수능 날 마킹을 밀려쓰거나, 1페이지에서 계산 실수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약과일 정도로 갖가지 잡생각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 걱정들, 내가 바라는 합격의 가능세계, 그리고 일반적인 현실세계와 유사성이 매우 낮은 극단적인 일들인데 내가 걱정해서 뭘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누군가는 수능 날 마킹을 밀려쓰고, 1페이지에 계산 실수가 나옵니다. 하지만 그런 사고에 대비해 연습을 많이 하면, 매우 높은 확률로 여러분에게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마치 등굣길에 교통사고를 당할까 봐 두려워 등교를 안 하는 학생으로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1년 동안 분명 어딘가에서는 등하굣길 교통사고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그게 두려워서 등교를 안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불안감은 스스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 공부를 놓기보다 의식적으로 목표와 유사성을 더 높이도록 노력해보세요.
여러분이 원하는 그 가능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유사성을 높이는 공부를 합시다.
#추신
team 은행사거리 파이팅! 그리고 선덕고 후배들 파이팅!
#오늘의 시 추천
손톱깎이 – 왕구슬
제가 봤던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은 상징을 사용한 시입니다. 잘라내도 잘라내도 자라나고야 마는 손톱은 비단 사랑만이 아니라 수험생의 앞날에 대한 걱정과 불안과도 닮아 있습니다. 그럴 땐 손톱을 다듬듯, 오늘 칼럼 내용을 잘 기억해서 앞으로 마음가짐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제 응원과 걱정 또한 끊임없이 자라는 손톱 같네요.
누군가 내게
'당신은 그를 얼마나 사랑하나요'
하고 묻는다면,
나는 외면하며
'손톱만큼이요'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돌아서서는,
잘라내도 잘라내도
평생 자라나고야 마는
내 손톱을 보고
마음이 저려
평펑 울지도 모른다.
고려대
권기범 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