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22기 목표달성장학생 조경진입니다.
1일1칼럼 3일차이자 마지막 날이네요.
몇몇 분들이 1일1칼럼을 쓰기 좋은 환경이 어떤 환경이냐
물어보셔서 설명드리자면, 제가 대학신문의 수습기자로
일하고 있는데 3일간 당직 근무를 서게 되었습니다.
근데 근무라고 해봤자 그냥 앉아서 죽치고 있는 게
다라서.. 자연스럽게 칼럼을 각잡고 써보자 생각했습니다.
제목에서 보셨다시피 퀴즈의 정답은
’망설‘과 ’멋설‘이었습니다.
예상못했는데 망설을 맞추신 분이 한 분 계시더라고요.
따로 댓글로 말씀드려서 선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나도 망설과 멋설 중에 맞춘 거 있다 하시는 분은
이 칼럼에 꼭 댓글 남겨주세요. 확인해볼게요.
참고로 댓글 수정 기능 없으니까 괜히 해보지 마십쇼!
저도 이렇게까지 많은 분들이 시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망상, 명상, 몽상, 미신이 제일 많이 나왔고
일부 수험생분들은 고된 학업 때문인지
몽쉘, 메시, 멱살, 머슴, 밍숭과 맹숭 등
정말 기발하다 못해 황당한 답안을.. 달아주셨습니다.
밍숭과 맹숭으로 칼럼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ㅋㅋㅋㅋ
어쨌든 이런 퀴즈를 진행한 이유는
수험생 분들이 ‘망설 그리고 멋설’이라는 제목을 보고
궁금해하셨으면 좋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퀴즈 없었으면 제목 보고 그냥 넘기셨을 분들도
많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슬슬 망설과 멋설이 대체 뭔 소린지
그냥 선물 주기 싫어서 헛소리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실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망설과 멋설은 작년에 제가 재수하면서
접했던 문학 작품들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고
또 제 가치관 형성에도 도움을 주었던 작품들의 제목입니다.
망설은 작년 2026학년도 수능특강에 수록된 홍성민의 한문산문이고,
멋설은 2005학년도 기출임과 동시에 김동욱 선생님의 일클래스 11주차에
항상 수록되어 있는 조지훈 시인의 수필입니다.
오늘은 이 작품들을 함께 다시 살펴보고
관련한 저의 생각들을 한 번 여러분과 나눠볼까 합니다.
”공부에 도움이 안 되겠네“라고 생각하고 나가지 마시고,
또 읽다가 국어 공부하는 것 같다고 나가지도 마시고..
분량이 상당히 길 수는 있지만..(어쩔 수가 없네요.)
잠깐만 시간을 내서 끝까지 읽어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비단 이번 입시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더 나은 마음가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칼럼은 정답이 아니고
멘토들의 의견과 경험을 담은 글일 뿐이니,
본인의 생각과 다르다고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고
각자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아래에 망설과 멋설을 옮겨 적은 텍스트가 나올텐데
이해를 돕기 위해 어휘나 표현을 다듬은 부분이 있으니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제 예전 칼럼인 ’수험생 멘탈 관리법‘ 칼럼을
읽고 오시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 망설 - 홍성민
몇 해 전 북경에 가게 되었을 적의 일이다.
마침 병에 걸려서 가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걱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한 손님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그대는 걱정하지 말게. 내가 한 마디 하여
그대가 무사히 다녀오게 해 주겠네.
얼마 전 임당 정유길이 북경에 갔는데, 늙고 병들었기에
가는 길에 죽지 않는 비결을 생각하다가 홀연 잊을 망 자를 깨달았다지.
마치 불교에서 걱정하지 않는 데 힘쓰는 것처럼
생각이 떠오르면 곧 잊어버렸지.
그래서 만리 길을 다녀오면서도 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그대도 이를 법으로 삼아보게나.”
이에 나는 그 말대로 했다. 외국에서 풍파를 겪을 때마다
잊는다는 한 글자를 기억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받아들여
걱정을 삭히고 밀쳐서 버렸다.
마음에 얽매인 것이 없자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병이 나았다.
덕택에 만리 길을 무사히 다녀왔다.
이 년 뒤 다시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또 이렇게 했다.
무릇 천자의 궁궐에 가는 길은 영광스러운 일이나
가고 돌아오는 데 몇 달이나 걸리니, 항상 근심스럽다.
그런데 이번에 가게 되는 북쪽 변방은 북경보다 훨씬 멀고
풍토와 기후는 요동보다 백 배나 나쁘다.
가기도 어렵고 머물기도 어렵고 돌아올 기약도 없으며,
죽는 사람이 아홉이면 사는 사람은 하나이다.
그러니 걱정과 고민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학문에 힘써서 이치에 따라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면
애타는 생각이 저절로 머릿속을 오갈 것이다.
늙고 병든 몸으로 기력이 다해 죽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어렵고 괴로운 와중에도 죽기가 싫어
또 임당 어른의 비결대로 했다.
부귀영화와 쇠락을 잊고, 삶과 죽음을 잊고, 뜻밖의 불행을
감히 따지지 않고, 어려운 일을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마음이 흔들리려 하면 너그럽고 편안하게 가슴속에
티끌만큼도 남지 않게 하여 본성을 해치지 못하게 했다.
아침에도 잊고 저녁에도 잊고 밤에도 잊고
앉아서도 잊고 누워서도 잊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한 걸음에 해당하는 공부를 하여 오랫동안 노력이 쌓이자
저절로 평온한 경지에 도달했다.
추위와 괴로움이 병을 만들지 못하고
재앙도 밖에서 이르지 않을 것이기에,
잊기에 힘쓰고 성찰하여 잊은 효과가 크다.
문왕은 유리의 감옥에 갇혔으나 거문고를 타며 노래했고,
정자는 부릉에 유배되었으나 모발이 이전보다 좋아졌다.
성현은 천명을 깨달아 즐거워하니 어찌 잊기를 기약하겠는가.
이치를 위주로 삼으니 저절로 잊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현보다 한 등급이라도 아래 사람이라면
스스로 잊기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호걸다운 선비도 우환을 당하면
시를 지어 근심을 풀고 술을 마셔 걱정을 잊었다.
그들이 터득한 바가 얕아 즐거워하며 근심을 잊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개는 송나라의 강직하고 단정한 군자이다.
그런데 파도가 치고 석양이 지는 가운데 술을 사서 어부의 노래를 듣자,
걱정이 없을 수 없어 술을 마시고 걱정을 잊고자 했다.
시비와 영욕을 모두 잊으며 시인의 불편한 마음 또한 술을 마셔서 잊은 것이다.
유배되어 몹시 불편한 마음을 잊을 수 있었던 것도 술을 마셔서이다.
그렇다면 잊는다는 한 글자의 유래는 오래된 것이니,
정유길이 스스로 터득하여 노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시도 짓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마음에서 잊는 것은
세상사에 노련하여 자잘한 일에서 벗어난 호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밖으로부터 우환을 만나더라도 잊으려고 노력하면
답한 마음이 풀어지고 좁은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허나 이것은 단번에 깨닫는 방법이니, 공부가 얕은 것이다.
평소에 학문에 힘쓰고 사색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부귀한 처지에 놓이면 부귀한 처지에 맞추어 행동하고,
빈천한 처지에 놓이면 빈천한 처지에 맞추어 행동하여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한다면야
어찌 꼭 이 한 글자에 의지해야 근심을 잊을 수 있겠는가.
다만 갑작스러운 우환은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고,
내 학문의 힘으로는 하루아침에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
그래서 이 글자로 가슴속을 넓혀 살아났으니 무슨 해가 되겠는가.
두 차례 북경에 다녀오고 북쪽 변방에 유배되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다. 손님의 이야기가
내게 큰 도움이 되었기에 감히 글을 짓는다.
홍성민의 망설은 읽으셨다시피, 걱정과 불안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글입니다.
많은 나이로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죽음이 두려워 근심하던 작가는 찾아온 손님에게
임당 어른의 비결, 잊을 망 자를 배우게 됩니다.
잊을 망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기며
부정적인 감정을 전부 잊으려 노력하고,
그 결과 험난한 길을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이에 걱정과 불안을 잠재우는 방법에 대해
생각을 넓혀 나가 자신만의 사고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문왕과 정자같은 성현들은 혹독하고 괴로운 환경에 처했음에도
천명, 즉 타고난 운명을 알아 오히려 즐거워 했다고 합니다.
이후 서술과 함께 생각해보면, 이들은 갑작스러운 우환을
예측할 수 있는 그러한 경지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천명을 깨달아 고난을 즐기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겠죠.
작가는 이러한 성현보다 한 등급이라도 아래인 사람은
스스로 잊기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작가 본인도 마찬가지이고요.
다만 그 방법을 나누어 설명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시를 지어 근심을 잊고 술을 마셔 시름을 푸는 것입니다.
결국 특정한 수단에 기대어 부정적인 감정을 잊는 방법인 거겠죠.
작가는 이들처럼 시와 술이라는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도
근심과 시름을 잊을 수 있는 것은 세상사에 노련해
자잘한 일에서 벗어난 호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즉 외부 수단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마음가짐과
정신을 수양해서 온전히 내면을 통한 잊음을 터득하는
세 번째 방법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죠.
글에서는 잊을 망 자를 새기는 것으로 드러나는 방법입니다.
작가는 이 세 번째 방법도 깨달음을 단번에 얻는 방법이기에
학문에 부단히 정진하고, 사색을 끊임없이 이어가
천명을 깨닫는 첫 번째 방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안분지족의 상태,
그 상태 자체가 천명을 깨달은 것이라고 봤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재밌는 것은, 작가는 산문의 마지막에 이러한 성현의 경지가
본인의 학문의 힘으로는 하루아침에 도달할 수 없는 경지임을 인정하면서
“이 글자로 가슴속을 넓혀 살아났으니 무슨 해가 되었는가.”라 말합니다.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미완성의 단계를 보통의 학자들은 인정하지 않고
완성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반면, 작가는 깔끔하게 그 자체를 인정하고
그 미완성의 방법이 도움이 되었음을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제가 이 글이 인상깊게 다가왔던 점은
바로 이러한 중간 지점을 짚어줬다는 것입니다.
제가 댓글로 많은 수험생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에 관한 질문도 많이 받았습니다.
“공부하면서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화도 많이 납니다.
이런 제가 너무 싫어요. 어떻게 하면 즐기면서 공부할 수 있나요?”
”수능이 너무 걱정되고, 불안합니다. 어떻게 수능날에 즐길 수 있나요?“
항상 제 답변은 비슷했습니다.
제 수험생 멘탈 관리법에 나와있는 마음가짐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이 최대한 들지 않게 할 수 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저도 공부를 즐기는 경지, 나아가서
괴로움과 걱정 그리고 불행을 즐기는 경지에 다다르진 못했습니다.
작가는 어떠한 처지에도 만족하는 삶의 자세가 성현의 경지라 말했지만
저의 수험생 멘탈 관리법을 관통하는 전제는
’만족은 불가능하다‘이니까요.
하지만 작가가 말했듯이,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미완성의 방법도 분명 도움이 많이 됩니다.
어쩌면 성현이 아닌 우리가 다다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르죠.
저는 그래서 여러분들께 괴로움을 즐기는 태도를 가지라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괴로움을 온전히 외부의 수단에 의존해서 잊는 대신
내면의 성장을 말미암아 잊어내는 것을 추구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왜냐하면, 스트레스나 짜증, 혹은 지겨움과 회의감 같은 감정은
게임, 음악, 운동 등의 외부 수단으로 어느정도는 해소할 수 있지만
수험생을 잡아먹는 불안, 걱정, 긴장 그리고
나아가 불행은 제대로 해소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잊을 망‘자는 수험생 멘탈 관리법의 세가지 단계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분의 ‘임당 어른‘이 되어 ’잊을 망‘자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꼭 저의 사고과정을 완벽히 이해하거나 따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외부 수단에 의존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잊는 것은
지름길처럼 보여도 돌아가는 길임을, 또 마음가짐과 정신을 다잡아서
건강한 내면을 통해 잊는 것이 지름길임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여러분이 나중에 입시를 마무리하고, 학업에 괴로워하는 이들을 만나면
그들의 ‘임당 어른’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멋설 - 조지훈
어떤 이 있어 나에게 묻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사느뇨?” 하면
나는 진실로 대답할 말이 없다.
곰곰이 생각노니 살기 위해서 산다는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산다는 그것밖에 또 다른 삶의 목적을 찾으면
그것은 사는 목적이 아니고 도리어 사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삶에서 부질없이 허다한 목적을 찾아낸들 무슨 신통이 있겠는가.
도시*, 산다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는 판이니
어째 살고 왜 사는 것을 모르고 산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
하늘이 드높아 가니 벌써 가을인가 보다.
가을이 무엇인지 내 모르되 잎이 진 지 오래고
뜰 앞에 두어 송이 황국이 웃는지라
찾아오는 이마다 가을이라 이르니
나도 가을이라 믿을 수밖에 없다.
촛불을 끄고 창 앞에 턱을 괴었으나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시 왜 사는가. 문득 한 줄기 바람에 마른 잎이 날아간다.
유위전변*, 바로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이 사나 보다.
우주의 원리 유일의 실재에다 ‘멋’이란 이름을 붙여 놓고
엊저녁 마시다 남은 머루술을 들이키고 나니
새삼스레 고개 끄덕여지는 밤이다.
산골 물소리가 어떻게 높아 가는지 열어젖힌 창문에서는
달빛이 쏟아져 들고, 달빛 아래는 산란한 책과 술병과
방우자*가 네 활개를 펴고 잠들어 있는 것이다.
‘멋’, 그것을 가져다 어떤 이는 ‘도’라 하고 ‘일물’이라 하고
‘일심’이라 하고 대중이 없는데, 하여간 도고 일물이고
일심이고 간에 오늘 밤엔 ‘멋’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멋이 있었다.
멋을 멋있게 하는 것이 바로 무상인가 하면
무상을 무상하게 하는 것이 또한 ‘멋’이다.
변함이 없는 세상이라면 무슨 멋이 있겠는가.
이 커다란 멋을 세상 사람은 번뇌라 이르더라.
가장 큰 괴로움이라 하더라.
우주를 자적*하면 우주는 멋이었다.
우주에 회의하면 우주는 슬픈 속*이었다.
나와 우주 사이에 주종의 관계 있어 이를 향락하고 향락 당하겠는가.
우주를 내가 향락하는가 하면 우주가 나를 향락하는 것이다.
나의 멋이 한 곳에서 슬픔이 되고 속*이 되고 하는가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즐거움이 되고 아*가 되는구나.
죽지 못해 살 바에는 없는 재미도 짐짓 있다 하랴.
한 바리 밥과 산나물로 족히 목숨을 잇고 일상의 서가 있으니
이로써 살아 있는 복이 족하지 않은가.
시를 읊을 동쪽 두던이 있고 발을 씻을 맑은 물이 있으니
어지러운 세상에 허물할 이가 누군가.
어째 세상이 괴롭다 하느뇨.
이는 구태여 복을 찾으려 함이니, 슬프다, 복을 찾는 사람이여,
행복이란 찾을수록 멀어 가는 것이 아닌가.
안분지족*이 곧 행복이라, 다만 알려고 함으로써 멋을 삼노라.
*도시 : 아무리 해도.
*유위전변 : 세상사가 변하기 쉬워 덧없음을 이르는 말.
*방우자 : 글쓴이의 호.
*자적 : 아무런 속박을 받지 않고 마음껏 즐김.
*속 : 세속.
*아 : 아름다움.
*안분지족 : 평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을 앎.
잘 읽으셨나요? 정말 멋지고 훌륭한 수필입니다.
조지훈의 멋설은 홍성민의 망설과 달리 긍정적인 감정에 대한,
나아가 행복에 관련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무엇 때문에 사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음을
드러내면서 수필을 엽니다. 그저 살기 위해서 산다는 것 이외의
삶의 목적을 설정하는 것은 부질없다고 말하죠.
삶의 목적에 대한 이러한 회의감은
이후 전개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작가는
찾아오는 이마다 가을이라 그러니, 가을이라 믿을 수밖에 없다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정경을 그저 받아들입니다.
다시 왜 사는가를 생각하던 작가는
문득 유위전변을 위해서 모든 것이 살아간다고 합니다.
유위전변을 조금 더 익숙한 말로 바꾸면
인생무상이 있습니다. 사람의 삶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인생이 덧없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덧없음이 어떻게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까요.
계속 봅시다.
작가는 우주의 원리 유일의 실재, 쉽게 말해
유일하게 존재하는 우주의 원리인 이 유위전변에
‘멋’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한 밤을 즐깁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이 세계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사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어록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결국 영원한 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죠.
우주의 원리에 멋이라는 이름을 붙인 작가는
멋을 멋있게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는 무상이며,
또 무상을 무상하게 하는 것은 멋이라 합니다.
변함이 없는 세상이라면 무슨 멋이 있겠냐는 말을 덧붙이죠.
작가는 이 변하는 것 자체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커다란 멋을 번뇌라고 이릅니다.
가장 큰 괴로움이라고 하죠.
여러분은 수험생활을 이어가는 지금, 괴로우신가요?
지금 이 시기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오나요?
아마 대부분의 수험생분들이 괴롭다고, 힘들다고 말씀하실 거에요.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험생활만을 이어간다면, 지금 이 2026년이라는 시간이
괴롭고 힘들게 느껴질까요? 그렇지 않겠죠.
사람들이 유위전변이라는 멋을 번뇌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과거에는 분명 수험생활을 시작하지 않은 시기가 있었고
여러분의 미래에는 분명 수험생활을 끝낸 시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이 ‘변화’하기 때문에 지금 시기를 괴로워하는 거에요.
“걱정없이 놀러 다니던 중학생 때가 그립다..”
“빨리 대학교 붙어서 대학생이 됐으면 좋겠다..”
이미 과거로부터 변화해온 현재가 괴로운 것이고,
아직 미래로 변화하지 못한 현재가 괴로운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이 변화는 비단 수험생활에 그치지 않습니다.
대학생 되면 마냥 행복할까요?
대학 동기들과 잘 맞지 않아서, 친구들이랑 잘 어울리던
고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할지도 모르죠.
직장에서 자리잡고 가정도 꾸리면 행복할까요?
늙고 지쳐버린 본인의 몸과 마음을 보며
걱정도 많고 불안에 떨었지만 ‘젊음’을 가지고 있는
과거의 시절을 사무치게 그리워할지도 모릅니다.
이건 미래가 아니라 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중학생 때는 초등학생 시절을, 초등학생 때는 유치원 시절을..
작가는 이런 것을 보며 세상 사람들이 변화라는 멋을
번뇌라고, 가장 큰 괴로움이라고 여긴다고 한 것이겠죠.
작가는 그래서 우주를 자적하면 우주는 멋이라고 말합니다.
변화를 속박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즐거움으로 본 것입니다.
반면 변화에 회의하게 되면 슬픈 속이 된다고 말하죠.
변화를 받아들이면 우주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고
내가 우주를 운반하고, 우주가 나를 운반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나의 멋, 즉 변화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이
슬픔과 괴로움이 되기도,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되기도 함을 덧붙입니다.
작가는 깨달음의 끝에 다다라서 만족을 얻습니다.
밥과 나물로 배를 채우고 읽을 책이 있으니 그거면 족한다고 말이죠.
족하는 것과 좋다는 것은 다릅니다.
식당에서 파스타 하나를 고르고 “난 이거면 됐어”라고 하는 것은
족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고르지 않아도 그 자체로 괜찮다는 겁니다.
식당에서 파스타 하나를 고르고 “이거 맛있겠다”라고 하는 것은
좋다는 것입니다. 샐러드든 피자든 더 먹을 가능성을 남겨둡니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자신이 처한 환경이 단순히 ‘좋다’고 말하는,
긍정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것만으로 ’족하다‘고 말하는
말 그대로 안분지족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홍성민이 말하던 그 성현의 경지에 이른 것이죠.
그는 이어서 시를 읊을 동쪽 두던이 있고, 발을 씻을 맑은 물이 있으니
세상이 어찌 괴롭냐 말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괴롭게 느끼는 이유는 구태여 행복을 찾으려 하기
때문임을 바로 덧붙이죠. 이 글의 주제를 함축한 문장이 이어 나옵니다.
“행복이란 찾을수록 멀어 가는 것이 아닌가.”
제가 망설에 이어서 멋설을 가져온 이유는
여러분께 이것을 전해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수험생 멘탈 관리법에 나와있듯이, 저는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평생 마음을 다잡아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최소한 ’변화‘를 나름대로 수용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재수 때 매일같이 제 마음속에 새기던 것이
바로 +1을 받아들이는 태도니까요.
진정으로 변화를 받아들이려면 미래에 불행한 방향으로
변화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괜찮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 과거로부터 변화해온 현재를 받아들여야 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진심이 변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위에서 작가의 삶의 목적에 대한 회의감을
이후 전개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했죠.
바로 이 변화에 대한 수용이 그 열쇠입니다.
수험생 분들이 “일생일대의 꿈”, ”인생의 목표”에 대해
종종 댓글로 말씀하시곤 합니다.
그 꿈과 목표에 대한 여러분의 진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진심은 분명히 변할 거라고 말씀드리는 거에요.
여러분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스카이, 혹은 의대에 가더라도
혹은 그 이상의 대단한 목표를 성취해내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성공에 대해 무뎌지고,
그동안 다지고 다져왔던 진심도 흐려질 거에요.
어쩌면 성취해내지 못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어릴 때 정말 너무나도 가지고 싶던 물건을 조르고 졸라
선물로 받게 되었는데, 순식간에 감흥이 없어졌던 경험이 있으실 거에요.
목표를 세우지 말아라, 꿈을 가지지 말아라 이런 뜻이 아닙니다.
수험생 멘탈 관리법에서 말씀드렸듯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진심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라는 그런 말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변하니까요.
“올해 무조건 대학에 가야만 해.”
“난 의대에 못 가면 실패한 인생이야.”
“인서울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낼 거야.“
이런 마음가짐으로 공부하면 수능날, 그리고 그 날이 다가오는
모든 순간들이 불안하고 긴장되고 두려울 거에요.
역설적으로 실패를 받아들이는 순간
가장 성공에 가까워집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행복이란 찾을수록 멀어 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은
제가 그동안 말씀드려왔던 “행복한 삶을 포기해서
눈 앞의 행복을 발견해라“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올 행복한 삶을 위해 지금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미래가 오는지와 상관없이 지금 내 눈 앞의 행복을 발견하세요.
구태여 행복을 추구하고, 그것을 인생 전체의 목표로 삼을수록
내가 살아가는 매일이 불행해질 거에요.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전해드리고 싶은 멋인듯 합니다.
이쯤되면 누군가는 질문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수험생의 행복과 불행이 대학생의 행복과 불행과 같은가?
수험생은 소소한 행복과 커다란 불행이 주변에 있고, 그에 비해
대학생은 커다란 행복과 소소한 불행이 주변에 있지 않나?
어떻게 커다란 행복을 곁에 둔 입장에서
커다란 불행을 곁에 둔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나?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학생 해봐라, 대학생도 나름 힘들다 이런 말로 답하고 싶진 않아요.
그동안 말씀드려왔듯이, 항상 행복한 삶, 항상 불행한 삶은 없습니다.
언제나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존재하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자기 곁에 있는 행복과 불행의 크기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지만
행복과 불행 중 어떤 것을 바라보는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옆자리에 앉은 관객의 옷이 특이하다고 해봅시다.
관객의 옷이 특이하면 특이할수록 영화 보다가도 눈길이 자주 가겠죠.
그런데, 옷이 많이 특이하다고 해서 영화에서 눈을 아예 돌려서
영화 시간 내내 그 관객만 쳐다보실 건가요? 당연히 아닐겁니다.
여러분은 영화를 보러 온 거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곁에 있는 불행의 크기가 크다고 해서
무조건 그걸 바라봐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여러분이 행복을 원한다면, 곁에 있는 행복이
아무리 사소하고 조그맣더라도 그 행복을 바라보세요.
가끔씩 불행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어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불행이 눈에 들어와도 머지않아
눈을 돌려 작은 행복을 바라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잊을 망‘자에 있겠죠.
그 커다란 불행이 옆에 있음을
잊고, 또 잊어냅시다.
많은 수험생들이 행복이 눈에 들어와도
이악물고 무시하고 그 커다란 불행을 의도적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혹은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곤 하죠.
”수험생이 무슨 소확행이야. 행복은 대학교 붙고 챙겨.“
”수험생은 원래 불행한 거야. 모르고 공부 시작했어?“
”나 방금 웃은 거야? 수험생이 웃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정신 차리고 공부나 해.“
수험생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수험생도 웃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험생들 대다수가 현재의 불행에 집중하면서
미래와 과거에 관해서는 행복에만 집중한다는 거에요.
대학교에 붙어서 행복하게 학교생활하는 미래,
혹은 어린 시절 공부 걱정 없이 놀러 다니던 과거.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대에 행복과 불행은 공존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각 시간대에 어떤 것을 바라볼지 결정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커다란 불행만을 바라보며
현재 옆에 있는 조그맣지만 소중한 행복들을 무시한 사람들은
결국 나중에 커다란 행복이 곁으로 오더라도 바라볼 수 없을 겁니다.
현재에 대해서는 너무 오랫동안 불행만을 바라봤기 때문에
미래나 과거가 아닌, 곁에 있는 행복을 바라보는 법을 잊은 거에요.
현재로 찾아온 그 커다란 행복에 잠깐 눈길이 가더라도
어느순간 원래 하던 대로 불행을 바라보고 있겠죠.
“대학교 왔는데도 별거 없네.”
“하, 나는 언제쯤 행복해질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불행할까.”
말이 상당히 길어졌지만, 이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수험생과 대학생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수험생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강조할게요.
곁에 있는 행복과 불행의 크기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지만
어떤 것을 바라볼지는 우리가 결정합니다.
그리고, 지금 행복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무리 큰 행복이 오더라도
절대로 바라볼 수 없을 거에요.
# 마무리하며
일단 사과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칼럼 분량이 진짜 길었죠? 죄송합니다.
제가 진짜 못하는 게 분량 조절이라서요.
10000자가 넘어가는 수많은 글자들의 나열을 지나고 또 지나서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네요.
글은 좀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딴에는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썼는데, 반응이 어떨지는 모르겠네요.
아, 진짜 마지막으로 누군가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약간 덧붙이자면
저는 만족하는 것을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족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계속 말씀드리는 이유는
저는 아직도 바라는 게 많거든요.
여러분께 이 칼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도 바람이니까요.
다만 어떠한 바람이든 이루어지지 않아도 정말 괜찮다 그 뿐입니다.
그러면 1일1칼럼 연재는 오늘로 마치겠습니다.
3일간 제 칼럼에 관심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네요.. ㅎㅎ
돌아올 그 날까지 다들 평안한 나날이 되시길..!
아래는 김동욱 선생님의 영상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추신. 생각해보니까 칼럼 쓴다고 저녁을 걸렀습니다.
잊을 망 잊을 망 하다 보니까 저녁까지 잊어버렸네요.
그만큼 진심을 다해서 하나 하나 써내려간 칼럼이니
도움 되셨다면 추천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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