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러분. 제20기 목표 달성 장학생, 서울대학교 의예과 이규현입니다. 저번 칼럼에 남긴 메일 주소로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께서 고민을 보내주셔서 놀랐습니다. 백 통이 조금 넘는 메일이 왔는데, 모두 답변해 드리지는 못했고 내용을 정성스럽게 적어주신 분들 위주로 답변을 드렸습니다.
첫사랑 이야기를 칼럼에서 다루어 달라는 메일이나, 좋아하는 연예인, 이상형 등 개인적인 취향을 물어보시는 메일, 갑작스럽게 기프티콘을 이미지로 첨부하신 메일 등은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러한 내용의 메일은 조금 자제하여 주시고, 학업과 관련된 메일만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소개팅 앱에서 외모 점수 몇 점 정도 나오셨냐고 물어보신 여학생이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내년에 후배로 들어오셔서 친해지면 재밌는 이야기 많이 해드릴 테니까, 지금은 부디 학업에만 정진하여 주세요.
사담이 길었습니다. 두 번째 칼럼은 제가 신촌에서 존경하는 교수님을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합격을 통보받은 뒤, 제가 존경하던 교수님 몇 분께 메일로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다들 면담 신청을 받아주셨고, 바쁘신 일정을 쪼개서 저에게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처음 들렸던 곳은 반포에 있는 의과대학 교정이었고, 두 번째로 들린 곳이 오늘 말씀드릴 신촌에 있는 의과대학 교정이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무척 존경하던 교수님을 찾아뵐 생각에 격식을 차린 옷을 빼입고, 진심을 눌러 담은 손 편지도 챙겼습니다. 서울대입구역에서 신촌역까지 2호선을 타고 가면서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신촌역에 내리자마자 대학교 점퍼를 입은 분들이 한가득 계셨고, 저는 그들 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러 병원 앞에 도착했습니다.
병원 앞에서 교수님께 인사를 드린 뒤, 교수님께서 밥을 사주신다며 근처의 식당으로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금요일 저녁이었기 때문에 대기 줄이 길었지만, 예약이 되어 있어서 편하게 들어갔습니다. 교수님과 참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야구의 한화이글스 이야기, 검도 이야기, 제 선배이신 자제분 이야기 등 이야기꽃이 활짝 피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원래 술을 안 하시던 교수님께서 술을 드시는 것을 보고, 이 자리가 교수님께도 즐거우신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술을 한 잔씩 마시면서, 저는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와 교수님 모두 너무 좋아하는 책이었기에, 서로 말하고 싶은 것이 한가득 있어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서울, 1964년 겨울'은 시신 기증과 생명의 문제를 도대체 왜 금전적 가치로 환원해서는 안 되는지, 저에게 늘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책입니다. 저는 수험생 때 순수한 마음이 흐트러질 때면, 늘 이 책을 꺼내서 외판원 사내의 비참한 마음에 처절히 공감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교수님은 책에 등장하는 병원에 직접 근무하시기 때문에, 더욱 이 책에 마음이 간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혹시 이 책을 모르시는 분이 있을까 해서 설명하면, 외판원 사내의 자살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외판원 사내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시신을 카데바로 신촌의 병원에 넘깁니다. 그는 카데바 값으로 받은 사천 원에 괴로워하며 중국집에서 음식을 먹고, 귤을 사 먹고, ‘안’과 ‘나’에게 넥타이를 사주는 데에 돈을 쓰다가 울컥한 나머지 냅다 불길 속에 돈을 던져버립니다. 사내는 ‘안’과 ‘나’에게 함께 있어달라고 돈을 쓰며 애원하지만, 둘은 사내를 차갑게 외면하고 결국 사내는 여관에서 자살하고 맙니다. 외판원 사내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아내의 시신을 판 돈까지 모조리 썼지만, 결국 절망했고 “여보”라고 중얼거리며 울다가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내와 나는 참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아내가 어린애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은 몽땅 우리 두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돈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돈이 생기면 우리는 어디든지 같이 다니면서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딸기 철엔 수원에도 가고, 포도 철엔 안양에도 가고, 여름이면 대천에도 가고, 가을엔 경주에도 가 보고, 밤엔 함께 영화 구경, 쇼 구경하러 열심히 극장에 쫓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급성 뇌막염이라고 의사가 그랬습니다. 아내는 옛날에 급성 맹장염 수술을 받은 적도 있고, 급성 폐렴을 앓은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만 모두 괜찮았었는데 이번의 급성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 죽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찢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
“사내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사내는 가끔 여보라고 중얼거리며 오랫동안 울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열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그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여튼, 교수님과 함께 책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말씀을 들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이 돈만 바라보고 하기에는 참으로 사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한다, 우리 학교 들어오는 학생들이 제발 이런 책을 읽으면서 사내의 아픔에 눈물 흘릴 줄 알았으면 좋겠다, 등 교수님께서 진심 어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제가 전공하고자 하는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가이시자, 평생을 학문에 헌신하신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하나도 허투루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날, 막차가 끊긴 시간에 택시를 타고 돌아오면서 택시 안에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잔뜩 취한 상태였지만 머릿속은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고민을 놓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 놓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숭고한 의업의 길을 걷고자 하는 학생이 있다면, 저와 비슷한 고민을 치열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신촌의 의과대학을 지망하는 학생이라면, 그 학교의 부속 병원이 등장하는 ‘서울, 1964년 겨울’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4월 초, 벚꽃이 참 예쁘게 피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내년에 대학 교정에서 누군가와 함께 보실 벚꽃을 떠올리면서, 공부에 더욱 전념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Appendix. 메일로 취미를 물어보신 분들이 많이 계셨는데, 제 취미는 문학 창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찰대 시험 관련해서도 많이 물어보셔서 따로 답변해드리면, 2024년도 경찰대 1차 시험에서 국어는 98점(1문제), 영어는 96점(2문제)을 맞아서 최초 합격을 하기는 했습니다.(수학은 90점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만, 장학생 중에 경찰대 재학생이 계시기 때문에 제가 경찰대 시험을 다루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여서 다루지 않을 예정입니다.
서울대
이규현 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