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칼럼에서도 평가원 기출 문제를 하나씩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이번 칼럼에서 살펴볼 문항은 2024학년도 9평 1번 문항부터 10번 문항까지, 총 열 문항입니다.
1번. 메타 윤리학 · 실천 윤리학과 윤리학의 분류
해당 문항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내용만을 담고 있고 추가로 살펴볼 내용도 따로 없으므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2번. 칸트와 서양 윤리
우리가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21’ 칼럼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도덕 법칙의 자율과 강제에 대한 칸트의 관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칸트>
도덕 법칙에 따른 행위 : 자율적이면서 강제적인 행위
1. 자율적인 행위 : 자연적 경향성 등 이성 외부의 요소에 종속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도덕적으로 수행하는 행위
2. 강제적인 행위 : 자기 자신에 대한 강제, 즉 내적 강제에 따른 행위
따라서 칸트는 해당 문항의 제시문에서도 도덕성은 행위가 의지의 ‘자율’과 맺는 관계이며, 의지의 준칙이 자율성의 법칙과 필연적으로 조화를 이룰 때 그 의지는 선한 의지가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지의 준칙이 자율성의 법칙과 필연적으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율적이게 된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자율적이라는 것은 경향성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즉 경향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선한 의지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① 친구들 사이에서 더 인정받을 수 있는 행위를 선택하세요.
③ 친구와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끄는 행위를 선택하세요.
한편 위 두 선지가 적절하지 않은 선지이게 되는 것은, 칸트에 따르면 친구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친구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 이 모든 것은 나의 욕구인데, 욕구에 이끌려서 행위를 하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21’ 칼럼에서 살펴보았듯, 욕구 같은 외부의 요소에 이끌려 타율적으로 행위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④ 가능한 행위 중에서 의무로부터 비롯된 행위를 선택하세요.
한편 칸트는 의무로부터 비롯되는 행위만이 도덕적일 수있다고 주장하므로, 당연히 해당 선지가 적절한 선지가 되고요.
3번. 장자 · 맹자와 삶과 죽음의 윤리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때[時]를 만났기 때문이고 어쩌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은 순리[順]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나 기쁨이 들어올 틈이 없다.
갑은 도가 사상가 장자입니다. 장자에 따르면 삶과 죽음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에 인간의 감정을 개입시켜서는 안 됩니다.
삶은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보다 더 원하는 것[義]이 있기에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 않는다. 또한 죽음은 내가 싫어하는 바이지만 이보다 더 싫은 것[不義]이 있기에 환란으로 죽더라도 피하지 않는다.
한편 을은 유교 사상가 맹자인데요. 을이 유교 사상가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참고로 공자인지 맹자인지는 모르셨어도 괜찮습니다.)
삶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기에 ‘구차하게 살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보다 더 싫은 것이 있기에 ‘환란으로 죽더라도 피하지 않는다’ 이 두 표현이 포인트입니다.
유교에 따르면 죽음보다는 삶이 더 좋은 것이고(이는 제시문에서 ‘삶은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그리고 ‘죽음은 내가 싫어하는 바이지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삶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의로움[義]입니다.
따라서 의로움을 저버리고까지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바로 유교의 주장입니다.
한편 일반적으로는 죽음을 추구할 필요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보다 더 싫은 것이 있으니, 불의가 바로 그것이고, 따라서 환란으로 죽게 되더라도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의로움을 위해서는 죽음을 기꺼이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에 따라 을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도덕적 가치의 실현을 가장 중시하는 유교 사상가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① 갑 : 죽음을 거부하면서 도덕을 실천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도가에서는 당연히 죽음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고, 도덕을 실천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지요.
도가에 따르면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삶이든 죽음이든 그저 받아들일 일입니다.
② 갑 : 삶과 죽음은 낮과 밤처럼 순환하므로 초연하게 대해야 한다.
도가에서는 삶과 죽음을 낮과 밤, 그리고 사계절에 많이 비유합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낮과 밤, 그리고 사계절 사이에는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모두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도, 낮과 밤이 오는 것도, 사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두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둘째, 모두 순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낮밤도, 사계절도, 계속해서 순환합니다.
따라서 이처럼 제시문에서 삶과 죽음을 낮과 밤, 그리고 사계절에 비유하고 있을 경우, 그 제시문의 사상가는 도가 사상가 장자이게 된다는 사실도 알아 두시면 좋을 것입니다.
④ 을 : 삶과 죽음을 서로 차별하지 말고 동등하게 수용해야 한다.
아까 위에서 제시문을 분석할 때 함께 살펴보았듯 맹자는 삶과 죽음을 엄연히 차별하고 시작하지요. 분명히 ‘삶은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죽음은 내가 싫어하는 바이지만’라고 전제를 깔아 놓고 들어갔었습니다.
따라서 삶과 죽음을 서로 차별하지 말고 동등하게 수용해야 한다는 말에 맹자가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⑤ 갑과 을 : 삶과 죽음은 슬퍼하거나 기뻐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장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그러하겠지만, 맹자의 입장에서는 아니지요.
유교 사상가들은 기본적으로 죽음에 대해 예를 갖추어 슬퍼할 것, 즉 애도할 것을 강조합니다. 애도에 대한 유교와 도가의 관점, 모두 기억하고 계시지요?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25’ 칼럼에서 살펴보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유교와 도가의 관점>
1. 공통점 : 죽음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현상임
2. 차이점
→ 유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애도의 대상임
→ 도가 : 그러므로 죽음은 애도의 대상이 아님
따라서 해당 선지는 맹자의 입장 때문에라도 적절하지 않은 선지가 되는 것입니다.
4번. 사생활 침해 문제와 정보 윤리
해당 문항은 독해형 문항이므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5번. 생식 세포 유전자 치료와 생명 윤리
해당 문항은 독해형 문항이므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6번. 야스퍼스 · 하이데거와 과학 기술 윤리
갑은 야스퍼스입니다. 우리가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4’ 칼럼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과학 기술에 대한 야스퍼스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야스퍼스>
1. 과학 기술 그 자체 : 선 X 악 X 가치 중립적인 수단
2. 과학 기술의 활용 방향 : 선악의 가치 판단이 필요함
한편 을은 하이데거입니다. 역시나 우리가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4’ 칼럼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하이데거>
과학 기술의 수단적 면모는 과학 기술의 본질이 아니며, 탈은폐를 통해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탈은폐적 기능이야말로 과학 기술의 본질임
→ 과학 기술 그 자체, 과학 기술의 활용 방향에 대한 가치 판단 및 윤리적 성찰이 모두 요구되며, 절대 과학 기술을 가치 중립적으로 고찰하려고 해서는 안 됨
하이데거는 실제로 과학 기술을 가치 중립적으로 고찰할 경우 인간은 무방비 상태로 기술에 내맡겨진다고 주장합니다.
가뜩이나 과학 기술은 인간과 자연의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윤리적으로 고찰하지도 않는다면, 사실상 과학 기술로 하여금 인간과 자연의 존재를 알아서 규정하라고 무방비 상태로 내맡기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들은 조금 낯설다고 생각되는 선지들만 몇 개 골라서 살펴보겠습니다.
② 갑 : 기술의 활용 방안은 인간의 결정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과학 기술이 그 자체로 지향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이 과학 기술에 특정한 목적을 부여하고, 그 목적에 따라 과학 기술을 사용하지 않으면, 과학 기술은 활용되지 않고, 따라서 인류에 긍정적인 영향도 그리고 부정적인 영향도 미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자체로 지향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인간의 결정에 따라 활용 방향이 전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는 과학 기술의 특성을 두고 야스퍼스는 ‘공허한 힘’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과학 기술은 분명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기는 한데, 그 자체로 지향하는 목적이 없으므로 그냥 힘이 아니라 ‘공허한’ 힘이라는 것이지요.
⑤ 갑과 을 : 기술은 인간의 개입이 없을 때에도 해악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해당 선지 역시 야스퍼스의 입장 때문에라도 적절하지 않은 선지이게 되는 것입니다.
③ 을 : 기술은 가치 판단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통제되어야 한다.
아까 하이데거의 입장에서는 기술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또 없다고 하였지요. 따라서 해당 선지는 적절하지 않은 선지가 되고요.
④ 을 : 기술은 인간이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보기에 과학 기술의 탈은폐적 본질에 대해 서술하는 선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하이데거에 따르면 과학 기술은 인간과 자연이 관계 맺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존재를 규정할 수 있으니까, 인간과 자연이 어떠한 존재 의미로 상호 간에 관계를 맺을지 그 방식 역시 규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시나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4’ 칼럼에서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제가 예시를 들어 드렸던 것, 모두 기억하고 계시지요? 기억이 안 나시면 얼른 복습하시고 오세요!
7번. 롤스와 시민 불복종
제시문의 사상가는 롤스입니다. 제시문의 첫 번째 문장을 한번 같이 읽어 봅시다.
시민 불복종은 정치 체제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시민들에 의해서만 행해진다.
우리가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4’ 칼럼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롤스는 시민 불복종과 혁명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습니다.
<혁명과 시민 불복종>
1. 근본적인 틀(체제, 기본 구조, 헌법)에 대한 저항 : 혁명
2. 개별적인 법, 제도, 정책에 대한 저항 : 시민 불복종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컨대 체제가 부정의한 사회에서는 시민 불복종이 원천적으로 성립 불가능하게 되며, 그처럼 근본 틀이 부정의한 사회에서는 혁명이 요구된다는 사실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롤스의 입장에서는 시민 불복종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 불복종을 하려고 하는 그 시민이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체제의 합법성은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만약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체제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민이라면, 그 시민은 곧 혁명을 하러 가거나, 또는 혁명의 의도로 유사 시민 불복종을 하려고 하는 식으로, 모르기는 몰라도 진정한 시민 불복종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 만약 실제로 그 사회의 체제가 부정의한 경우라면 애초에 시민 불복종 자체가 성립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롤스는 제시문의 첫 번째 문장 다음부터는 ‘간접적 시민 불복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롤스의 간접적 시민 불복종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11’ 칼럼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롤스에 따르면 부정의한 법을 변혁하기 위해 시민 불복종을 할 때, 반드시 시민 불복종의 대상이 되는 바로 그 문제의 부정의한 법을 어기지는 않아도 되는데요.
즉 불가피한 경우에, 문제가 되는 그 법 말고 다른 법을 대신 어기는 시민 불복종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롤스의 주장이었지요.
그리고 이렇게 하는 시민 불복종을 두고, 그 법에 대해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다른 법을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하는 시민 불복종이라고 하여, 간접적 시민 불복종이라고 하였습니다.
롤스가 간접적 시민 불복종을 인정하는 경우로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문제가 되는 법이 너무나도 거대하여 그 법을 어기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경우입니다.
롤스는 반역죄를 규정해 둔 법을 예시로 들었는데, 막말로 이 법을 고치겠다고 반역죄를 저질러 버리면 그 처벌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어쨌든 롤스에 따르면 시민 불복종의 결과로 처벌을 감수하기는 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반역죄에 대한 처벌은 일반적으로 최소 종신형 최대 사형일 것입니다.
시민 불복종을 위해 목숨까지 감수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생각을 해 보았을 때, 너무 비합리적인 처사인 것 같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 경우 반역죄를 규정해 둔 그 문제의 법에 저항하기 위해 다른 법을 위배해 보이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시민 불복종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롤스의 주장이었습니다.
둘째는 문제가 되는 법이 애초에 외국인이나 또는 타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서 그 법을 어길 수가 없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당연히 그 법을 애초에 어길 수가 없는 것이므로, 대신 다른 법을 위배해 보이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시민 불복종을 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입니다.
이제 선지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우선 1번 선지입니다.
① 시민 불복종은 정치 체제의 효율성을 이유로 제한될 수 있다.
우리가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24’ 칼럼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롤스는 시민 불복종에 가담하는 인원이 너무 많을 경우에 시민 불복종이라는 불법 행위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져 체제의 혼선이 초래되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고 구속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의 체제의 힘이 약화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시민 불복종을 하기 위한 [방금 규정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똑같이 타당한 사정을 가진 많은 집단들이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모두 이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 경우 정의로운 체제의 효율성을 침해하게 될 극심한 무질서가 따르게 된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체제를 파멸로 이끌지 않기 위해, 이로써 모든 이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기 위해 시민 불복종에 가담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이처럼 체제의 효율성이 저해되는 것, 이것이 바로 롤스가 보기에 시민 불복종이 초래할 수 있는 불행한 결과인 것입니다.
물론 시민 불복종이 그 자체로 사회에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민 불복종의 규모가 너무 커질 경우, 이와 같은 파국이 초래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롤스는 시민 불복종을 하기 전 시민은 시민 불복종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불행한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해당 선지처럼 체제의 효율성이 저해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에는 체제의 효율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시민 불복종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② 시민 불복종이 성립되지 않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일 수는 없다.
우리가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4’ 칼럼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롤스의 입장에서 사회의 기본 틀이 부정의한 사회에서는 시민 불복종이 아니라 혁명이 필요하게 되어, 시민 불복종이 성립 불가능하게 됩니다.
반면 너무 정의로워도 시민 불복종이 불가능했는데, 이 경우가 바로 ‘완전하게 정의로운 사회’의 경우였지요.
롤스에 따르면 근본 틀도 이미 정의로운데 일부 법, 제도, 정책조차 심각하게 부정의할 일이 없는, 사회 내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도 있습니다. 이 사회는 아주 이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사회를 두고 롤스가 ‘완전하게 정의로운 사회’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이처럼 완전하게 정의로운 사회에는 심각하게 부정의한 법, 제도, 정책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으므로, 시민 불복종을 할 것이 없게 되어, 시민 불복종이라는 개념이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았을 때 롤스의 입장에서 시민 불복종이 성립 가능한 사회는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체제, 기본 구조, 헌법 등의 근본적인 틀은 정의롭지만, 가끔 또 심각하게 부정의한 법, 제도, 정책이 제정되기도 하는 ‘거의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따라서 롤스는 ‘오직’ 거의 정의로운 사회에서만 시민 불복종이 발생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것입니다.
② 시민 불복종이 성립되지 않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일 수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롤스의 입장에서 시민 불복종이 성립되지 않는 사회로는 완전하게 정의로운 사회도 있는데, 이 사회도 어쨌든 정의로운 사회 중 하나라는 점에서, 해당 선지는 적절하지 않은 선지가 됩니다.
③ 안정적인 체제에서는 시민 불복종 행위에 대해 처벌하지 않는다.
거의 정의로운 사회처럼 안정적인 체제에서도 당연히 시민 불복종 행위에 대해 처벌이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시민 불복종은 엄연히 불법 행위이고, 불법 행위에 대해 처벌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며, 거의 정의로운 사회가 비록 보복적인 의도를 가지고 처벌하려고 하지는 않더라도, 불법 행위에 대해 처벌을 가하게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롤스는 시민 불복종의 주체는 그러한 처벌을 감수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해당 선지는 적절하지 않은 선지가 됩니다.
④ 공적 심의를 거친 정책이 시민 불복종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제가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25’ 칼럼에서 불완전한 절차적 정의에 대해 설명을 드리며 말씀을 드렸듯, 롤스에 따르면 현실에 이 절차에 따라 법을 만들기만 하면 그 결과로서 제정되는 법은 무조건 정의로운 법이라고 보장해 줄 수 있는 완벽한 법 제정 절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선지에서 사실 공적 심의 대신 무슨 말이 들어가든, 즉 무슨 과정을 거쳤든 간에, 시민 불복종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정치적 과정을 거쳐 만든 법이든 모든 법은 부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어쩌면 시민 불복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선지 역시 적절하지 않은 선지이게 됩니다.
⑤ 시민 불복종은 다수결의 원칙에 대한 반대를 표하는 정치 행위이다.
롤스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법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만들어지고, 그렇게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법을 대상으로 시민 불복종을 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수결의 원칙 그 자체에 대해 반대를 하는 것인가요?
시민 불복종의 주체가 하고 싶은 말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이렇게 부정의한 법이 만들어졌으므로, 앞으로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지 말자는 것일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다수결의 원칙 같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은 당연히 존중하되, 그렇게 만들어진 법들 중 심각하게 부정의한 법에 대해서만 시민 불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물론 다수결의 원칙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당하는 법을 정의롭게 고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해당 선지 역시 롤스가 부정할 선지가 되는 것입니다.
8번. 도가 · 유교와 의식주 윤리
해당 문항은 독해로 충분히 풀어낼 수 있는 문항이므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다만 해당 문항은 의식주 윤리 문항 중에서도 음식 윤리 문항인데, 여러분, 제가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17’ 칼럼에서 이미 말씀 드린 바 있지요?
유교, 불교, 도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음식을 먹는 행위가 단순히 우리의 식욕을 채우고 생존하기 위한 행위는 아니라고 본다는 것이라는 사실을요.
만약 음식을 먹는 행위는 그냥 살기 위해 음식을 먹는 행위이기만 하고 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어떠한 제약 사항도 없다고 본다면, 그 사상가는 애초에 생윤 교육과정의 의식주 윤리 파트에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즉 모두 음식을 먹을 때 어느 정도의 조절과 제약 사항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인데, 다만 각 사상 또는 사상가가 추구하는 바는 서로 다르므로, 어떻게 그리고 왜 조절하고 제약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보통 유교, 불교, 도가, 아리스토텔레스 각각 본인이 원래 제시하던 관점에 맞추어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파트의 문항을 푸실 때는 각 사상 또는 사상가의 본래 주장을 떠올리셔서 풀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9번. 베카리아 · 칸트와 형벌
갑은 베카리아입니다. 베카리아에 따르면 법은 특수 의사의 총체인 일반 의사를 대표합니다. 즉 베카리아는 사익을 추구하는 의지, 다시 말해 특수 의사의 총합이 곧 일반 의사이게 된다고 보고, 법은 이와 같은 일반 의사를 표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베카리아가 보기에 법은 개인의 최소한의 자유를 모은 것입니다. 개인은 자신의 권리를 최대한 적게, 즉 최소한 양도하려고 하기 때문에, 법은 개인의 최소한의 자유를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17’ 칼럼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베카리아가 보기에 법에는 개인의 생명을 빼앗는 내용이 포함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 계약 과정에서 그 누구도 자신의 생명권을 양도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사실상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권리를 양도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베카리아에 따르면 아무리 나의 생명이 나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처분할 권리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데요.
만약 내가 나의 생명을 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죽고 싶을 때 자살해 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인가요?
정말 각자에게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권리까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누가 자살해 버린다고 해도 그에 대해 아무 문제 제기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 처분권을 발휘하여 자신의 생명을 자유롭게 처분한다는데 무엇이 문제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생명은 분명히 고귀하고 신성한 가치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사회적인 문제이며, 우리가 아무리 개인의 자유를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저버릴 자유까지 인정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개인에게는 애초에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생명 처분권을 국가에게 양도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국가는 개인들의 생명을 처분할 권한을 애초부터 가지지 못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국가에는 시민을 사형에 처할 정당한 권한이 없게 된다는 것이 바로 베카리아의 주장이었습니다.
ㄱ. 갑 : 범죄 억제력은 형벌의 강도가 아니라 지속도에서 나온다.
베카리아는 범죄 억제력이 형벌의 강도보다 주로 형벌의 지속도에서 나온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형벌의 강도에서 아예 안 나온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지속도가 아주 낮지만 강도는 아주 높은 사형에도 범죄 예방 효과가 있기는 함을 베카리아도 인정하잖아요?
따라서 베카리아의 입장에서도 형벌의 강도에서 범죄 예방 효과가 아예 안 나온다고 할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17‘ 칼럼에서 말씀을 드린 적 있는데, 생윤 시험에는 ‘A가 아니라 B’ 형식의 선지가 종종 출제됩니다.
그런데 보통 이 경우, A에 옳은 것이 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A가 아니라 B인 것이 아니라, 예컨대 B도 맞고 A도 맞거나, 아니면 오히려 B가 아니고 A가 맞도록 하여, 결과적으로 ‘A가 아니라 B’라는 말은 잘못되어서 해당 선지가 적절하지 않은 선지이게 되도록 선지를 만드는 경우가 꽤 자주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A가 아니라 B’라는 구조의 선지가 출제되었을 경우, 우선 의심부터 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A가 아닌가? 혹시 A가 맞는 것은 아닌가?
만약 A가 맞다면, 그 선지는 바로 적절하지 않은 선지가 됩니다. 굳이 B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ㄴ. 갑 : 종신 노역형은 범죄자보다 시민들에게 더 큰 공포를 준다.
베카리아는 종신 노역형이 범죄자보다 시민들에게 더 큰 공포를 준다고 봅니다. 그런데 단순히 베카리아가 이렇게 본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이유까지 알아 두셔야 합니다.
노역형은 수형자보다 구경꾼에게 더 큰 공포를 안겨 준다. 구경꾼은 수형자가 당하는 불행한 순간 순간의 고통의 합산을 고려하지만, 수형자는 눈앞의 순간의 비참함에 사로잡혀 미래를 생각할 여력이 없다. 고통의 체험 속에 사는 수형자는 구경꾼들이 알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위안과 변통거리를 찾아낸다. 구경꾼은 불행한 수형자의 무감각해진 마음 대신 자신의 현재의 감수성으로 사태를 판단한다. 구경꾼에게 수형자의 모든 고통은 상상 속에서 더욱 증폭된다.
베카리아에 따르면 첫째로, 범죄자는 순간만의 고통을 느끼지만 시민들은 그 범죄자가 지금까지 받았을 고통과 앞으로 받게 될 고통까지 모두 합산하여 생각합니다.
즉 범죄자는 지금 당장 하는 노역의 고됨만을 느끼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와, 저 사람은 몇 년째 저러고 있는데 앞으로 죽을 때까지 저래야 한다고? 정말 얼마나 힘들까?”라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둘째로, 범죄자는 시민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자신만의 위안과 변명거리를 찾아내서 그것으로 스스로 위로를 받습니다. 예컨대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다행이지’, ‘사형보다는 종신 노역형이 낫지’, ‘열심히 노역하는 나, 나름 멋있을지도’ 같은 것입니다.
셋째로, 범죄자는 너무 오랜 기간 노역하여 고통에 몸과 마음이 무감각해진 후이지만, 시민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그 고통을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끼고, 심지어 상상력 속에서 본인이 체험해 보지 못한 그 고통의 크기를 증폭시키기까지 합니다.
이상의 이유로 베카리아에 따르면 종신 노역형은 범죄자보다 시민들에게 더 큰 공포를 주고, 따라서 범죄자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적은데 또 범죄 예방 효과는 높다는 점에서, 공리에 부합하는 형벌이 됩니다.
ㄷ. 을 : 형벌 자체는 범죄자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필요악이다.
칸트의 입장에서 형벌이 범죄자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살펴보았는데요.
칸트의 입장에서 형벌이 필요악이기도 할까요...?
형벌이 필요악이려면 일단 형벌이 악이기부터 해야 할 텐데요. 그런데 칸트가 형벌을 악이라고 주장하는 바가 있었나요...?
제가 해당 선지를 통해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은 선지가 출제되었을 때 여러분께서 가장 먼저 생각해 주셔야 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단순히 해당 사상가가 그것에 대해서 선이라고 언급한 바 또는 악이라고 언급한 바에 대해 일일이 찾으려고 하시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입니다.
어차피 윤리 과목은 어느 정도 논리적 추론이 필요한 과목입니다. 즉, 여러분께서는 각 사상가의 입장에서 어떤 것이 선인지 악인지 논리적으로 ‘추론’을 하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리 과목은 본질적으로 각 사상가가 제시하는 다양한 옳음의 기준을 배우는 과목입니다. 이는 곧 우리는 윤리 과목 개념 공부를 통해 이미 각 사상가가 제시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 다시 말해 그 사상가가 생각하는 선악의 기준을 배웠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칸트가 제시하는 선악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의무는 도덕 법칙에 따라 행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칸트가 제시하는 선악의 기준은 그것이 도덕 법칙을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도덕 법칙을 어기는 것인지가 되겠습니다.
이 내용을 그대로 형벌 파트에 적용해 봅시다. 칸트에 따르면 형벌은 선일까요, 악일까요?
칸트는 형벌의 법칙이 도덕 법칙이자 정언 명령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칸트의 입장에서 형벌은 공적 정의, 다시 말해 응분의 보복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범죄자의 범죄 행위에 상응하는 응분의 보복으로서의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도덕 법칙에 부합하는 선이 됩니다.
따라서 칸트는 형벌이 악이 아니라 오히려 선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주장합니다.
ㄷ. 을 : 형벌 자체는 범죄자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필요악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해당 선지는 칸트가 애초에 형벌을 악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는 선지가 되는 것입니다.
ㄹ. 갑과 을 : 사형을 오직 본보기로 집행하는 것은 부당하다.
베카리아에 따르면 사형을 집행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며, 칸트에 따르면 사형을 본보기로 집행하는 것은 사형을 외부의 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므로 부당합니다. 따라서 해당 선지는 적절한 선지가 됩니다.
10번. 테일러 · 레오폴드 · 싱어와 환경 윤리
갑은 테일러, 을은 레오폴드, 병은 싱어인데요. 싱어의 제시문을 한번 같이 읽어 봅시다.
동물 학대가 인간 학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우리가 동물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종 차별주의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실제로 싱어는 동물 학대가 인간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동물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종 차별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비판합니다.
이는 사실 칸트의 주장을 저격하는 것입니다. 칸트야말로 도덕성에 기여하는 자연적 소질을 계발하여 인간에 대한 의무를 지키기 위해 동물을 괴롭히지 말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상가이니까요.
나는 동물 학대가 인간 학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동물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피하였다. 물론 다른 동물에게 친절할 경우 인간에게도 친절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이것이 예컨대 아퀴나스와 칸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동물에게 친절해야 하는 참된 이유라면, 이는 전적으로 종 차별주의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이 이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며, 그들을 도덕적 배려의 대상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싱어는 이처럼 인간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면서 동물 학대를 반대하는 것은 동물의 고통을 인간의 고통과 동등하게 고려해 주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경시하는 것으로, 종에 따라 존재를 차별하는 종 차별주의적 태도의 일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 선지로 들어가 봅시다. 우선 ㄱ 선지는 너무 쉬우니까 그냥 넘어가고, ㄴ 선지부터 살펴봅시다.
ㄴ. B : 개체에게 생명 공동체와 동등한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
우선 ‘개체’ 그리고 ‘생명 공동체’가 나왔으므로, 게임 끝입니다. 개체론과 전체론을 비교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레오폴드는 개체보다 전체를 중시하는 전체론 사상가입니다. 반면 레오폴드를 제외한 사상가들은 전체를 중시하지 않고 개체만 중시하는 개체론 사상가입니다.
그리고 해당 선지에서 개체는 말 그대로 개체이고, 생명 공동체는 전체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았을 때 레오폴드의 입장에서는 생명 공동체의 가치 > 개체의 가치 입니다. 반면 다른 사상가들의 입장에서는 생명 공동체의 가치 < 개체의 가치 입니다.
이상의 내용에 따라 전체론 사상가인 레오폴드이든 다른 사상가들이든 그 누구도 생명 공동체와 개체의 가치가 똑같다고, 즉 동등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론인지 개체론인지에 따라 생명 공동체를 더 우선시하든지 개체를 더 우선시하든지 둘 중 하나인 것이지, 둘을 동등하게 고려하는 사상가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 공동체와 개체를 동등한 가치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해당 선지는 모든 사상가가 동의할 선지가 됩니다.
ㄷ. C : 인간은 본질적으로 식물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없다.
해당 선지에서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별하는 방법은 제가 이미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25’ 칼럼에서 설명 드린 바 있습니다.
두 존재 간 어떤 존재가 본질적으로 우월한 존재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두 존재가 모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인지 아니면 한 존재만 도덕적 고려의 대상인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만약 두 존재가 모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라면, 두 존재 중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반면 두 존재 중 한 존재만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라면, 도덕적 고려의 대상인 바로 그 존재가 다른 존재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푸시면 ㄷ 선지도 역시나 정말 쉬운 선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ㄹ 선지의 경우에도, ‘[생윤] 평가원 기출 분석19’ 칼럼에서 자연 자체의 선을 위해 개체를 희생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전체론적 입장을 취하는 사상가 레오폴드뿐이며, 나머지 사상가들은 모두 애초에 자연 자체의 선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설명 드린 바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선지 역시 넘어가겠습니다.
이번 칼럼은 여기까지입니다. 모두 오늘 남은 하루도 힘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